[좋은아침] 1959년 쿠바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소련과 패권을 다투던 미국의 눈길은 중남미로 향하게 된다. 미국이 중남미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택한 정책은 경제원조인데, 그 시작은 판 아메리카오퍼레이션(OPA)이다. OPA는 1958년 JK 대통령의 제안으로 만들어져 아메리카 국가 간의 경제협력 초석을 다졌고, 미국은 2년 뒤에 미주기구(OEA) 산하 위원회를 만들어 더 적극적으로 중남미 사회개발 명목으로 원조정책을 펼치기 위해 BID (미주개발은행)에 기금을 조성하기로 한다.

1961년 8월 브라질을 포함한 중남미 22개 국가들과 미국은 ‘진보연합’ 창설하기 위해 우루과이 푼타 델 에스테에서 ‘푼타 델 에스테 헌장’을 채택한다. 진보연합은 미국국제개발기구(USAID) 하여금 기금을 운용하기로 하였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이미 그해 3월 중남미를 위해 사회개발과 관련해 200억달러를 원조하기로 했다. 또한, 계획을 관리하는 기구를 OEA, BID 그리고 UN 산하 중남미경제위원회 (CEPAL)을 선정했으며, 이들은 브라질과 관련해 정부 대상으로 인플레이션 관리와 정부 재정 운영의 안정화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브라질 정부는 사회개혁을 진행하겠다고 화답했었다.
내전으로 긴박했던 8월 말에서 9월 초 그리고 장고의 합법화 운동
장고는 중국 순방을 마치고 프랑스를 거쳐 브라질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이때 브라질에서는 장고의 탄핵 또는 하야를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정치인들은 프랑스에 있는 장고에 연락해, 브라질에 들어오면 바로 체포가 될 것 같으니, 일단 망명을 선택하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브라질 내에서도 장고의 세력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브라질 노동정치계의 대부인 Leonel Brizola이다. 브리졸라는 당시 히오 그란지 두 술 주지사로 장고의 대통령직 승계를 위해 국민 여론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먼저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데, 당시 브라질 군대는 4군단 체제로 제1군단은 히우 데 자네이루에 위치해 가장 많은 군사를 보유했고, 제2군단은 상파울루, 제3군단은 히우 그란지 두 술 그리고 제4군단은 북동쪽에 있었다. 여기서 브리졸라는 제3군단장인 Machado Lopes에게 현 체제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쿠데타를 막아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여, 군 집행부 수장이자 장고의 하야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Odílio Denys 군사부 장관은 한 발짝 물러서게 한다.

장고는 계속 유럽에 머물고 있었고, 8월 29일에는 파리에서 뉴욕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향하며 의회에서는 그의 탄핵안이 부결된다. 8월 30일부터는 브리졸라는 고이아스 주지사인 Mauro Borges Teixeira지지를 받게 되었고, 또 군 내부에서도 내분이 생긴다. 제2군단인 상파울루지역은 중립을 지키기로 하였고 군사가 가장 많았던 제1군단은 무력 행사를 해야 한다는 그룹과 내전은 피해야 한다는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순간 속에 고이아스에 있던 11연대가 장고의 편에 선다고 하자, 무력 행사를 주장하는 군인들은 결정해야 했다.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 내전을 펼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물러설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이때 나온 절충안이 Tancredo Neves (2010년 PSDB 대통령 후보 Aecio Neves의 할아버지)의 내각제 제안이다. 전 법무부 장관이자 미나스의 합리적인 정치인인 딴끄레도는 장고를 만나기 위해 우루과이로 향했고, 군 반대 세력의 명분을 만들어주고자 장고에 내각제를 제안한 것이다. 장고는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했지만,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군의 강경 세력은 내전을 치를 각오하고 있다고 하며, 설득에 성공한다. 그렇게, 의회에선 임시개헌안이 통과되며, 장고는 대통령으로 그리고 딴그레도는 제1당의 지원을 받아 브라질에서 유일무이한 국무총리가 되며, 장고의 합법화 운동 (Campanha da Legalidade)는 13일 만에 무혈 충돌로 마무리가 된다.
뒤죽박죽의 장고 정부 그리고 소련
우여곡절 속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한 장고였지만 그의 정부 정책은 매우 편향적이었으며, 당시 상황에서 호시탐탐 정권을 노리던 이들에겐 빌미만 되었을 뿐, 전혀 화합적이지 못하였다. 브라질 전 대통령인 사르네이는 장고 정부를 보면서 “이들은 스스로 군 쿠데타를 유발한 정치를 했었다”라고 판단을 한다. 몇 가지의 정책들을 보면 알 수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소개하면:
● 최소 은퇴 연령 제거: 이로써, 브라질은 일정 기간의 근무 기간을 채우면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된다. 특히 연금에서 공무원 연금에 가장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지금도 40~50대에 은퇴한 공무원들은 많은 연금을 받아, 브라질의 비생산성의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참고로 은퇴 연령은 2018년 연금 개혁을 통해 최소연령이 다시 제정된다.
●토지개혁: 철도와 고속도로 근교에 있는 미사용 토지 분배. 정부는 토지주인들에겐 국채로 지급하며, 토지는 지역 노동인들에게 분배가 되는 정책이었다. 당시 과격했던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토지개혁은 공산주의 정책을 모방하여서 한다고 할 정도로 매우 과격한 정책이었다.
●조세개혁: 61년 자니오 정부 때 나온 정책으로 브라질에 있던 외국기업들의 영업이익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것은 제한하는 정책이다. 62년 의회에 통과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64년에 시행된다. 이 정책은 브라질에 외국인 직접투자를 하락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선거개혁: 일반 병사와 문맹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외에도 1946년에 강제 해산된 브라질 공산당(PCB)의 복귀를 허가했다. 또다시 정적들에게 빌미는 주는 정책이었다.

결국, 그가 추진했던 모든 개혁은 당시 시대의 흐름으로 풀어보자면 매우 진보적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개혁들이었다. 특히, 브라질 군부는 2차 대전 이후로 친미 성향을 갖고 있었던 점도 고려를 해야 할 부분이다. 이렇다 보니 브라질의 기득권인 엘리트층과 군인들은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하며, 어떻게 해서든 장고를 권력에서 끌어내려야 하며, 민주적인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정권을 잡을 수 있는지에선 여전히 회의적이라 여러 의견이 도출된다.

장고는 이러한 개혁 정책 외에도 미국엔 절대적으로 위험 신호인 1961년 소련과의 국교를 수립하였고, 그다음 해에는 쿠바의 미주개발기구 퇴출을 공개적으로 반대 한다. 그렇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냉전 시기의 정점인 쿠바의 미사일 위기 (1962년) 때 장고는 미국편이 아닌 중립적인 스탠스를 취해 많은 이들을 불안케 하였다.
군사쿠데타를 위한 초석
분명하게 이야기하면 브라질에서의 군사 쿠데타는 미국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컸었다. 물론 이에 대한 명분은 장고를 비롯한 진보 정치인들이 준 것이 맞다. 특히나, 냉전 시기에 미국은 소련의 미주지역 확장을 경계하였고,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 영향력을 행세했었다. 1963년 미국은 장고 정부의 경제 분야를 포함한 개혁정책들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자, 더한 압박을 행사하기 위해 중앙정부 프로젝트보다는 장고의 반대 세력으로 대표되는 주에 원조한다. 대표적으로는 친미 성향이자 군 쿠데타 옹호 세력이었던 라세르다가 주지사로 있는 과나바라주와 히우 그란지 두 노르찌였다. 이렇게, 장고는 원조를 받는 게 어려워지자 다른 방안들을 찾아갔고, 미국은 자신들의 옹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원조 정책으로 많은 정치인을 포섭하기 시작한다.

1963년 9월에는 해군과 공군 상사들의 무력 시위가 일어난다. 당시 연방최고법원 (STF)는 의회 선거에서 당선된 하급 군인들의 당선을 무효로 하면서, 이들은 무력 시위를 펼쳤지만, 바로 진압이 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 사건과 관련해 중립적인 태도를 위하자, 장교들을 비롯한 장군들은 장고에 불만이 가득해진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은 1964년 3월 해군과 해병대의 하급 군인들의 급여 인상을 위한 단체행동이다. 물론, 이 역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빠르게 진압이 되었지만, 하급 군인들의 연이은 시위는 위계질서를 우선시하는 군 내부에선 위기로 다가왔고, 이들은 그 원인을 장고에 돌린다. 여기서 장고에 던져진 화살의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눠지는데, 첫 번째는 하급 군인들의 처벌 과정을 간섭하여 전부 석방하라고 명령을 하게 되며, 두 번째는 장고의 개혁과 관련한 국민 여론전은 군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시 장고의 여론전은 수만 명의 군중을 모을 정도로 파괴력이 대단했고 사회개혁에 대해 노동자와 공무원 협회 그리고 학생들을 모았었다.

그렇지만, 당시 장고의 정부는 일반 국민들에게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 않아 사회는 분명히 나뉘어있었고, 군을 포함한 쿠데타 옹호 세력은 이를 파고 들어갔다. 이들에게는 명분이 필요했고, 명분은 정치인들이 만들어줬다. 3월 19일 Marcha da Família com Deus pela Liberdade (자유를 위한 하나님과 함께하는 가족 행진)이 상파울루에서 개최되는데 총 약 30~50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 행진은 야당의 주요 정치인들을 비롯해 여러 시민단체가 참여했는데, 주장은 간단하였다, 브라질 내에서의 경제자유주의를 위해 공산주의 퇴치로 보수적인 성향이던 있던 종교계까지 참여시켜, 사회를 분열시키는 데 일조했었다.
1964년 4월 1일 군사쿠데타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군대 내부에서는 때가 되었다고 하며 일부 장군 간에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장고는 계속해서 노동자들 기반으로 정부 옹호 시위를곳곳에서 개최하고 있어, 이들 군인은 대책 회의를 이어가고, 구체적으로 쿠데타 개시 날짜를 논의했었다. 그렇게, 4월 1일 새벽 Olímpio Mourão 미나스 제4연대 대장이 군사를 이끌고 Juiz de Fora에서 1군이 있던 히우 데 자네이루로 향했다.
Mourão 군사들은 히오와 미나스 국경에서 대립했었지만, 실제 교전은 일어나지 않은 채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자, 상파울루 2군 사령관이었던 Amaury Kruel은 장고에게 연락하여 공산주의 활동이 의심되던 노동부총책 (CGT)을 당장 해산 하여 내전을 예방하자고 제안했지만, 장고는 거절하며 상파울루 2군도 쿠데타에 동참한다. 상파울루 2군은 1군이 있던 히우 방향과 3군이 있던 히우 그란지 두 술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킨다. 이때 히우 1군은 상파울루 2군이 쿠데타 세력과 동참하자,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게 된다.

4월 1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장고는 일단 브라질리아에서 3군이 있던 뽀르또 알레그리로 피신한다. 이때 히우 주지사였던 브리졸라는 장고에게 3군을 통해 저항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렇게 되면 어마한 내전이 펼쳐질 것이니 장고는 거절한다. 4월 2일 의회에서는 장고가 아직 브라질 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자신의 직책을 회피하였다고 하여, 대통령직이 공석이 됨을 선포하며 하원의장이 그 직을 승계한다고 발표한다.
장고가 순순히 내전을 피한 채 쿠데타 세력에게 정권을 내준 것에 대해선 여러 가지의 비판이 있었지만,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가 바로 미국의 참전이었다. 일명 Brother Sam 작전이라고 불린 이 작전은 4월 2일부터 브라질 해안을 향해 항공모함, 헬기 모함을 출동시켰었다. 결국, 브라질 내에서의 주권을 뺏길 수 없었던 미국의 참전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장고는 순순히 여론전만 펼치다, 권력을 군인들에게 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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