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1954년 8월 24일 히우 데 자네이루에 위치한 까데떼 궁 (Palácio Cadete)에서 바르가스 대통령은 자살한다. 바르가스는 대통령직에 취임한 순간부터 국가주도 경제 개발과 노동자 중심의 사회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당시 기득권이었던 농업과 산업화 세력들에게 반발을 샀었고, 의회에선 여소야대 정국으로 노련했던 그마저도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이렇게 혼란 스러운 과정에서 제1야당인 UDN의 지도자였던 Carlos Lacerda 암살 미수 사건이 그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온다.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난 Lacerda는 법대를 졸업했지만, 법조인의 길보단 기자의 길을 걸었었는데, 이념적으로는 집안의 배경으로 공산주의를 신봉했지만, 1935년 공산주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동안 잠적했다가, 극보수 성향의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바르가스가 대선에 나온다고 했을 때부터 그는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을 해왔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큰 존재감은 없었는데, 1949년에 창업한 Tribuna da Imprensa 신문사을 통한 비판은 매일 같이 바르가스의 강한 정적으로 그의 존재감을 키워 나갔다.
1954년 8월 5일 바르가스의 개인 경호원인 Gregório Fortunato는 몇 명의 암살자들을 고용해 Lacerda를 저택 앞에서 저격했지만 실패로 그친다. 당시, 그의 경호를 담당하던 Rubens Vaz 소령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그는 발부분만 저격당해 살아남게 된다. 사건은 경찰이 맡게 되어 암살자들은 빠르게 잡혔고 이들은 암살 배후를 Gregório라고 지목을 하자, 바르가스는 바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Lacerda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바르가스에게 명예로운 퇴진인 하야를 공개적으로 요구한다. 결국, 여론까지 뒤를 돌아버린 상황에 군대 내에서도 바르가스가 하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었다. 바르가스는 자신의 부통령이었던 Café Filho에게 하야를 하겠다고 하더니, 잠시 생각을 바꾸어 갑작스럽게 자살을 결정하여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예상치 못했던 국민 여론과 바르가스 반대 세력의 집권 유보
100%의 최저임금 인상과 기득권 세력의 기대와 반대로 창업된 Petrobras로 당시의 경제 권력과 대척을 하던 바르가스는 국민을 향해 자신은 힘이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하는 세력들에게 밀려 죽음을 선택한다는 메세지를 남기게 되며, 이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다.
먼저, UDN로 대표되는 반대세력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정권을 잡을 것이라 예상을 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국민 반응으로, 집권이 어려워진다. 특히, 당시의 국민은 UDN가 바르가스의 죽음을 주도했다고 믿었었고, 지식층에선 Lacerda가 군과 결탁하여 새로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런 배경이 가능했던 이유는 Lacerda 본인 때문이다. 그는 바르가스가 상원의원일 때 공개적으로 바르가스는 대선 후보가 되면 안 된다고 하였고, 만약 후보가 돼서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혁명을 통해 끌어내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Café Filho는 UDN에게 내각에 장관직을 참여토록 하여,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려고 했었다. 이때 UDN은 정국이 자신들이 원했던 대로 가지 않자, 1955년 대통령 선거 연기를 요구하지만, Café Filho는 거부를 한다. UDN이 대선을 연기하고자 했던 이유는 자신들의 정당에 대중적인 정치인 부족도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대선을 치르게 된다면, 무조건 패배하리라 전망 했기 때문이었다.
JK (주셀리누 쿠비체크)의 대통령직 당선
당시 정당들은 대표적으로 4개로 나뉜다. 제1당은 바르가스와 연립을 한 중도 성향의 PSD (사회민주당), 제2당은 보수를 표방한 UDN (국가민주연합), 제3당은 바르가스의 뿌리가 있던 PTB (브라질 노동당), 제4당은 바르가스와 연립을 한 중도좌파인 PSP (사회진보당)이다. (참고: 4개 정당 모두 지금은 존재 하지않는다). 1955년 대선 다가오자, PSD와 PTB에선 연립을 구성해 미나스 주지사였던 주셀리누 쿠비체크 (일명 JK)을 후보로, UDN는 장성 출신 Juarez Távora 그리고 PSP는 상파울루 주지사와 시장을 역임한 Adhemar Barros가 나섰다.
JK는 의사출신으로 군의관 (대위)을 역임한 뒤 1935년 미나스 하원의원, 1940년 벨로 오리존찌 시장, 1951년 미나스 주지사를 거친뒤 PSD의 대선후보로 나선다. 특히 그는, 1954년 8월 만네스만 제철소 기공식 때 바르가스를 초대하여, 바르가스의 마지막 공식 행사로 기록되었고, 바르가스의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주지사이기도 하였다. 그토록, 바르가스가 가장 어려웠던 순간 때, 그의 옆을 지켜준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이미 선거 직전부터 국민적인 인물이 부재했던 UDN는 예상대로 패배하게 되었고, Lacerda는 내부적으로 새로운 쿠데타를 준비했었다. 하나의 일례로 Lacerda가 하원의원으로 당선이 되어 민주주의 원칙을 따르겠다는 선언문을 읽자, PTB의 정치인이자 노동 정치인의 대부로 불리었던 Leonel Brizola부터 선언문을 읽는 도중에 방해를 당해 “당신은 거짓말쟁이이다. 밖에서는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여기에선 선서문을 읽다니!” 라고 제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1955년 임시 쿠데타 (Golpe Preventivo)
Lacerda는 군을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명분으로는 JK는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안된다고 주장 하고 있었는데, 이때 선거가 끝난 지 2달이 된, 11월에 군의 쿠데타 옹호 세력의 리더 중 한 명 이었던 Jurandir Mamede대령이 공개적으로 JK 대통령 취임을 막아야 한다고 하며, 군에선 본격적으로 쿠데타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Mamede의 발언으로 군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군내에서도 현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보수파와 쿠데타를 해야 한다는 강경파로 나눠져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전쟁부 장관이자 4성 장군 Henrique Teixeira Lott이다.
Café Filho 부통령은 대통령이 되자 반대파였던 UDN을 내각에 참여시키며, 전쟁부 장관에는 군부의 신뢰를 받고 있던 온건파 Lott를 임명하였다. 철저한 군인 정신을 갖고 있던 Lott는 공산주의자들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Lacerda같이 극보수 주의자도 경계를 했었다. Mamede의 발언이 있자, Lott는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를 했는데, 당시 대통령직은 Café Filho가 심장문제로 병가를 낸 상태라 UDN 정치인이자 하원의장이었던 Carlos Luz가 임시로 맡고 있어 처벌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국가의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고 느낀 Lott는 이대로 가다간 반대 세력이 JK대통령 취임을 막고 쿠데타를 일으킬것이라는 확신해 그해 11월 11일 역습쿠데타, 즉 민주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임시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역사는 이것을 Contra Golpe 또는 Golpe Preventivo라고 불린다.
육군에 막강한 영향이 있던 Lott는 군대를 결집하여, 주요 군부대를 장악하고, 정부 청사를 점령하게 되었다. Carlos Luz 대통령 대행은 직책에서 제거되고 의회는 원래 대통령이었던 Café Filho 복귀를 거부하자, 새 대통령직은 Nereu Ramos 상원의장이 맡게 되며, 정부는 임시 정부 체제로 유지된다. Lott 장군은 의회에 권력을 이양하면서 1956년 JK의 대통령 취임을 보장한다고 공포하며, 혼란스러웠던 순간은 임시로 봉합 된다.
불안정한 정권들의 연속과 경제
당시까지의 브라질 정권은 매우 불안정했으며, 군대는 광활한 땅에 널리 퍼져 있어, 쿠데타의 위협은 계속된다. 필자는 역사가들을 통해 왜 브라질은 항상 군사 쿠데타에 노출되어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아직은 그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주요사건들을 분석함으로, 나름대로 이유를 소개하자면, 역사적인 배경이 첫 번째 요인이고, 두 번째로는 영토로 인해서 군의 탈중앙화 그리고 세 번째는 1922년부터 시작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조심스럽게 주장을 한다.
역사적인 배경으로는, 1823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황제였던 동 빼드로 1세는 내각의 책임자였던 Bonifácio와 트러블이 생기자, 군을 이용해 의회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1840년에는 6세였던 동 빼드로2세가 헌법적으로 권력을 잡을 수 없게 되자, 그의 스승이 권력을 행사하기 희망했지만, 쿠데타로 저지되었다. 1889년 브라질의 건국도 군사 쿠데타로 가능했고, 1891년 군인 출신 대통령이었던 Peixoto역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실패하였다. 1930년과 1937년 바르가스도 군을 이용해 정권을 잡게 되며,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시기인 1945년도에는 바르가스는 자신이 도왔던 군이 압박을 해 하야를 하게 되었고, 1954년에는 같은 세력이 압박하여 자살을 하게 된다.
특히, 바르가스는 노동자 중심의 정책으로 자연스럽게 PCB (브라질 공산당)과 가까워졌고, 이는 2차 대전을 막 치른 군으로서는 결코 용납을 할 수 없었던 행동이라 여겨졌다. 그다음의 이야기는 모두가 다 잘 아는 1964년 군사 쿠데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바르가스는 새로운 군사 쿠데타를 막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고 하며, 이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분석이 된다. 바르가스가 군대와 결집한 자신의 반대세력인 UDN의 요구사항이었던 하야를 받아들었다면, 먼저 그는 정치권을 잃게 될 것이고, 매우 과격했던 UDN가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를 보장하는 것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UDN는 바르가스가 자살하자, 대선 연기를 주장했었다.
결국,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향을 취한 바르가스는 그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장문의 편지와 자살을 선택함으로, 군의 쿠데타를 10년간 연기를 했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물론, 바르가스가 과연 대통령으로서 브라질의 미래를 위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역시나 의문이 많이 남는다. 그가 자살했던 1954년 상반기에는 이미 바르가스 주요 인물들이 부패에 연루가 되어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소야대 정국에서도 그는 야당을 존중하기보단, 무시하는 자세를 펼쳤기 때문에, 야당 정치인들은 그가 독재자의 습성을 유지해, 그와 대화를 하기보단 무력과 영향력으로 권력에서 끌어내리려 했었다.
이렇게, 1954년에는 노동자의 브라질 그리고 국가중심의 개발을 희망하였던 한 대통령의 시대가 마감한다. 이때의 브라질 교육은 여전히 매우 열악하며 선별적이었고, 세계는 개발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을 때, 브라질은 막강한 노동자 보호로 사업하기 어려운 나라로 인식되어 산업은 여전히 뒷전이었고 정치는 군이라는 큰 그림자를 두고 내부의 총질들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순간들이었다.
4부에서 계속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