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더욱더 강한 재정개혁의 첫발은 긴급사회기금(FSE – Fundo Social de Emergência)의 조성이다. 당시 정부의 수입의 90%는 크게 3개 부문인 연방정부의 지방정부 재원 이전, 공무원 인건비 그리고 수입처에 따른 의무 지출 비용이다. 따라서, 정부는 당시의 재정구조로는 늘어나는 지출을 줄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또 새로운 재원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다. 여기에는 88년 헌법으로 연방정부의 세수가 줄자, 사회복지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어, 재정수지를 맞추기 위해선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고, 이것을 FSE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붙여서 설명하자면, 높은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의 상관성이다. 조세를 부과하는 시점과 내는 시점이 다르므로, 납부를 할 때는 이미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실제로 정부가 걷게 되는 세금이 낮아져 재정적자로 이르는 것이다. (설명: 해당 상관성을 처음 논문으로 발표한 사람은 이탈리아인 경제학자인 비토 탄지 하바드 경제학 교수다. 중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 경제학자인 훌리오 올리베이라가 탄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연구하여, 탄지-올리베이라 효과라고 명명된다). 재정적자 발생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당시 정부가 예산을 구성할 때 기대 물가지수를 낮게 잡고 있었고, 재무부도 상황에 따라 예산 집행시기를 주기적으로 연기를 했었다.
긴급사회기금은 긴급 적인 성격으로 2년간 운영이 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연방정부가 가진 세수 구조로 인해 FSE는 새로운 이름들로 여러 정권에 등장했었고, 실제로 마지막의 긴급사회기금은 DRU (Desvinculação de Receita de União – 예산 할당법)이란 이름으로 2018년도에 또다시 개정이 된다. 어쨌든, 브라질 정부는 여러 차례 예산 할당법을 통해 세수 구조를 바꿨지만, 그의 실용성에 대해서는 ‘완벽하지 못했다’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FHC 정책의 1단계인 긴급사회기금은 일부 항목들이 배제된 채 헌법의 일부 항목의 개정을 통해 1994년도 2월 말에 통과가 되었다. 긴급사회기금의 통과를 위해 상원 의회에서 살다시피 있었던 에지마르 바샤 (Edmar Bacha)재무부 장관 특보는 의회와의 협상에서 재정개혁이 진행되지 않으면, 그 어떠한 물가안정 계획도 없을뿐더러 자신들은 바로 퇴진할 것이라는 배수진을 치면서 협상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선 페르난도 엔히끼 (FHC)의 지원이 매우 컸다.
지금까지 모든 경제 정책이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었지만,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꼽자면, 모든 정책은 기습적으로 발표돼, 하루아침 가격이 동결되거나 가격 조정을 위한 새로운 물가 지수가 만들어져 국민들은 혼란스러웠고, 다른 점은 정치리더십이 부재였다. 사르네이 (1985~1989년 브라질 대통령)때의 끄루자도가 효과가 내기 시작했을 때, 경제팀에서는 가격동결은 일시적으로 이제 중단해야 한다고 했었지만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높아지는 지지율에 취해 듣지를 않았었다. FHC은 대외적으로 경제팀이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고, 이들이 정책과 관련해 정치적인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가 직접 나서 협상하며, 실마리를 풀었었다. 특히, 이따마르 대통령은 정부 재정을 확대 운영하거나, 일부 기업들의 민영화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때마다, FHC가 직접 나서 그를 설득하기도 했었다.
제2단계: 새 물가 지수, URV (우 – 에히 – 베)
1단계인 강한 재정 개혁이 통과되자, 경제팀은 분주히 움직인다. 1단계는 전쟁에 나서기 전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공급처에 대한 개혁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2단계인 물가를 안정화할 정책으로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군대와 무기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지난 경제팀들은 수축정책을 사용하다 보니 간, 경제를 더 혼란스럽게 했었고, 또 시도 때도 없는 물가지수 변경은 일시적인 효과만 나지, 지속해서 물가를 안정화하진 못했다. FHC의 경제팀은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선 일단은 물가 연동 해제를 추진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들은 통화를 통해 물가안정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난 경제팀과 마찬가지의 정책인 가격과 임금 동결정책을 취할 경우 경제가 고스란히 피해를 받던 것을 생각하면,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면서 물가를 점진적으로 하락하는 방안이 필요했다.
먼저 이들은 끄루자도 기반이 되었던 Larida Paper (라리다 논문: 빼르시오 아리다와 안드레 라라의 성에 기반한 논문으로, 물가안정을 위해 물가와 연동된 통화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에서 그 답을 찾기 시작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붙인다면, 구스따보 프랑꼬(Gustavo Franco)가 있었다. 프랑꼬는 PUC-RJ 경제학 출신으로 하버드에서 ‘1920년대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그렇지만, 유럽 국가들에서 구현된 안을 브라질에서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의 제약들이 많아 온전히 적용할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 1923년 독일, 1945년~1946년 헝가리, 1944년 그리스 그리고 1923년~1924년에 적용된 화폐개혁 정책들을 분석했고, 이 중에서 독일의 렌텐마르크화(Rentenmarks)가 그 모델이 된다. 렌텐마르크화는 그렇게 오래간 화폐는 아니었지만, 도입되는 기간엔 ‘긴급통화’라는 개념인 놋켈드 (Notgeld)가 도입되었고, 이 놋켈드가 달러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일의 물가를 일시적으로 안정화했었다.
비록 단기간이었을지라도 두 개의 화폐가 통용된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경제팀은 이를 기반으로 Unidade Real Valor (URV – 실질단위가치)를 제안한다. URV를 기획화 하는 데에 있어 경제팀은 매우 많은 반대를 겪게 된다. 대표적인 반대는 ‘국민들은 계산기를 두들기며 계산해야하는 URV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FHC는 지금까지 전통과 비전통 기반 경제정책이 번갈아 집행되는 것을 보면서, 그 어느 정책도 뚜렷한 답이 없고, 더는 소비를 제한 방식은 취할 수가 없었다.
우르비 또는 우-에히-베라고 불리던 URV는 몇 가지의 특징을 갖고 MP (임시 조치) 434을 통해 세상에 소개가 되었으며, 최종적으로 1994년 5월 27일 법령 8,880으로 의회 통과 후 대통령에 재가받아 공식적으로 공포된다. (설명: MP – Medida Provisória는 일명 임시 조치로 대통령이 긴급 적으로 제안하는 법령이다. 임시 조치는 대통령이 국가가 긴급 적인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으로 의회에서 상당 부분의 절차를 프리패스한다). 그렇지만, URV가 MP에서 법령까지는 매우 험난했다. 실제로 두 개의 화폐를 공통으로 통용하는 안은 1985년 끄루자도 정책에서 빼르시오와 안드레 라라가 이미 제안했었지만, 당시의 정부 법무팀에선 위헌이라고 판단해서 진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의 빼르시오 (BNDES 총재)는 법률적인 시비가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USP 법대 교수이자 은행을 포함한 금융법에 매우 밝은 조세 따데우 끼아라 (José Tadeu de Chiara)을 찾아가, 새로운 방안을 찾았고 끼아라 교수는 ‘통화의 개념은 법률적인 정의로 비롯된 것이다’라는 이론을 통해 URV에 대한 법률적인 방어를 준비한다. 실제로 URV에 대해서 법률적인 시비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STF (연방최고법원)에 소송된 건에선 합헌이라는 결정이 나며, 경제팀을 한숨을 돌리게 된다.
이제는 실전이다. 1983년 라리다 논문으로 탄생한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실제로 매우 다르다. 먼저, 이들은 기존 정책이 번번히 실패한 이유는 재정 관리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매번 적자였기 때문임을 잘 알기 때문에, 경제 정책 1단계로 강한 재정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2단계인 새 물가지수와 관련해 경제팀이 부딪힌 강력한 비판은 과연 브라질 국민들이 두 개의 화폐가 통용되는 것에 대한 이해와 매일같이 달라지는 URV 기반으로 계산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성공하면 어마한 혁신이겠지만, 확률은 실패에 더 가까웠고 많은 전문가들 역시 너무나도 복잡한 정책이라고 비판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