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군정의 시작과 함께 실행되었던 개발계획들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지만, 국가가 선도국가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분야인 교육과 관련한 성과에 대해선 비판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군정 초기엔 너무나도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니 그렇다 쳐도, 장기적인 시점에서 국가의 발전을 위한 필수요소인 교육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점은 분명 비판받아야할 문제다. 또한, 다른 전문가들은 이 기간에 대해 매섭게 비판하는 분야는 지난 편에서도 잠깐 다뤘던 임금에 대한 문제이다.
교육: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
1940년부터 1970년까지의 문맹률을 살펴보면 전체인구에선 51~56%가 문맹인이였지만, 서민계층으로 대변되는 흑인이나 혼혈인종은 30~37%였다 (예외적으로 혼혈인종 중 여자는 64~73%임). 백인들은 59~64%, 아시아계로 대표되는 황인들은 78~84%이다. 이는 당시 기초교육의 통계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1930년대 브라질인의 초등학교 진학률은 35%에서 1960년대에는 70% 이상으로 늘었지만, 실제 초등학교 재학 연도 수는 1.5년에서 2.5년밖에 안 되는 매우 형편없는 성적을 보였다. 이는, 광활한 땅과 50년대 이전까지 경제활동이 농촌에서 이루어져 높은 분포도로 교육 공급이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
1940년-1970년 브라질 문맹률
연도 | 전체 인구 | 백인 | 흑인 | 황인 | 혼혈인종 |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남 | 여 | |
1940 | 41% | 33% | 50% | 41% | 21% | 15% | 64% | 48% | 28% | 21% |
1950 | 44% | 38% | 54% | 47% | 24% | 19% | 76% | 67% | 30% | 25% |
1960 | 56% | 51% | 64% | 59% | 35% | 30% | 84% | 78% | 37% | 64% |
1970 | 62% | 59% | 73% | 70% | 46% | 42% | 87% | 83% | 47% | 73% |
출처: IPEA (브라질응용경제연구소)
1930년대 바르가스 정부 때 보건교육부 장관을 지냈던 까빠네마 (Capanema)는 중·고등학교 과정은 엘리트를 양성하는 과정이라고 인식해, 시장이 당장 필요한 일꾼을 만들기 위해서 기술고등학교를 만드는 데 주력을 했었다. 군정 때는 상황이 조금 나아졌지만, 의도치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먼저, 군정에도 주도한 조세개혁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67년 개헌을 통해 세수구조를 바꿨는데, 주 정부엔 ICM (유통세)와 시청은 ISS (서비스세)를 걷을 수 있게 한다. 당시까지 만에도 주 정부는 수입세와 수출세에 직접적인 참여가 있었는데, 세금 조달 방법이 달라지자, 상당수의 세금이 연방정부에 집중이 된다. 정부는 이에 대해 주 정부 참여기금 (FPE)와 시청 참여기금(FPM)들을 만들어 연방정부가 먼저 세금를 걷으면, 주와 시청에게 지원했지만, 교육에 대해선 시청과 주정부가 책임을 갖고 있어, 예산 집행이 효율적이지도 효과적이지도 못했다.
1936년부터 2000년까지 GDP비 세수율(%)
당시 기획부 장관인 깜뽀스는 고등교육이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했었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상류층의 자녀들만 대학교를 진학하기 때문에, 기초교육의 질을 늘려야 하는 목적이 있지만 그러기엔 저소득층 대상으로 예산을 늘려야 했었다. 다만, 연방정부의 교육과 관련된 예산은 기획부 장관이나 재무부 장관의 단독결정이 아닌 교육부 장관과 연방 교육자문회의(CFE)와 합의로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당시 연방 교육자문회의에는 모든 연방 대학교의 총장들이 위원으로 참가하는 반면, 기초교육 관계자는 2명밖에 없어, 항상 예산은 대학에 집중이 되었다. 이러한 대학교육 중심 정책은 매번 반복이 되는데, 그 이유는 대학에 예산을 집중하면 단기적인 효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브라질이 경제 호황이었던 룰라 정부 때도 기초교육보단 대학 교육에 예산이 집중되었었다.
국민소득과 최저임금
1964년 군정이 시작하는 시점으로 국민소득은 매우 가파르게 증가한다. 1973년과 1964년을 비교하면 66% 성장을 하지만 최저임금은 오히려 17%가 마이너스로 줄어들게 된다.
1956년부터 1973년까지 국민소득과 최저임금을 1999년 헤알 기준 성장률(%)
그렇지만, 초기 PAEG같은 경우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임금 동결정책으로 모두가 함께 어려운 시기를 참아내자는 구호가 통했지만, 그 이후로 지속해서 소득이 올라가는 상황에 최하단위에서 활동하는 노동자의 임금은 떨어졌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판단되며,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산업과 관련된 일자리가 많이 생겨 초임 노동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헤알로 환산하다 보니 빠진 것으로 분석하지만, 물가가 매년 20% 성장한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 노동자들은 소득이 낮아진 것뿐만 아니라, 구매력 역시 매우 낮아졌다는 점도 고려를 해야 한다. 이는 사회적인 지수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지니계수: 소득 분배의 불공정을 보여주는 지표로 0에 가까울수록 균등하고 1에 가까우면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뜻이다.
지니계수는 국가의 소득 분배의 불공정을 보여줌으로, 빈부격차를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다. 상기 차트를 통해 브라질의 지니계수는 60년대부터 지속해서 성장했다. 따라서, 「브라질 경제 기적」 말 그대로 브라질 사회에 기적으로 스쳐 지난간 것으로, 커진 소득의 파이는 대다수의 상류층에게 돌아갔고, 정부는 이에 대한 실질적인 계획과 행동이 부족했었다.
브라질 군정 전반기 경제 정책
브라질은 JK 정부 이후로 많은 산업화를 노력해왔다. 실제로 1930년 대공황 이후로 브라질은 수입 제품 대체 정책을 통해 산업화 확장을 노렸고, 이를 위해서 많은 제품의 수입을 제한했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수입 제품 대체 정책은 일정 기간을 두고, 국가의 경제 실력으로 증명이 될 수 있는 교육과 혁신 그리고 기업가에게 우호적인 환경을 구축한 뒤에 국내 제품들이 수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지만, 1930년~1960년의 브라질 정부는 사실상 이러한 노력들이 미미했다고 보면 된다. 특히, 군정 전반기에만 수많은 공기업을 만들어 국가 주도경제개발을 주도했다는 점도 결국엔 장기적인 관점에선 제대로 된 산업화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군정의 전반기는 1973년 끝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는 전 세계 경제를 뜨겁게 강타했던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