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브라질에도 과연 산업을 일구고 세계로 뻗어 나갔던 사업가들이 있었을까? 제국 때 소개를 했던 Mauá 남작이 대표적인 Entrepreneur (기업가 정신)을 갖고 있던 사업가인데, 브라질인들에게 이에 버금가는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모두가 동일하게 Francesco Matarazzo (프란체스코 마따라조) 라고 할 것이다.
1917년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로부터 백작 (Conde)의 작위를 받았던 Francesco Matarazzo (1857-1937)는 이탈리아인으로 19세기 말에 브라질에 이민을 온 사업가이자, 20세기 초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았던 이탈리아인으로 그의 활동 시기는 브라질의 산업화와 맞물려있었다. 총 350개가 넘는 공장을 소유하면서, 다양한 비즈니스는 내외적으로 펼쳤던 Matarazzo는 세계에서 7번째로 돈이 제일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오늘은 그의 인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7세로 무일푼 아닌 무일푼으로 이민
이탈리아 남부 카스텔라바테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난 Matarazzo의 브라질 이민 계기는 여느 이민자와 다르지 않게, 보다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서이지만, 이를 결정하기 이르기엔 크게 두 가지의 배경이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농부이자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의 죽음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가족 지인이 브라질이 기회의 땅이라고 소개를 했기 때문이다. 맞다, 19세기 말의 브라질은 선진국에서 보기엔 매우 많은 기회가 있던 땅이었다. 앞서 몇 차례 이야기를 했지만, 당시 브라질은 쌀까지 수입을 할 정도로 자국의 생산성이 없어, 간단한 무역만 해도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Matarazzo는 모든 가족과 함께, 돈유 (돼지 기름) 20t을 갖고 브라질로 향했다. 근데 정말로 운이 없었던지, 그가 갖고 오던 돈유는 과나바라해안에서 모두 잃게 되어, 계획도 없던 무일푼으로 브라질에서의 이민자 삶을 시작 하게 된다.
정착지로는 상파울루 지방이었던 Sorocaba시로 향했고, 어쨌든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가 선택한 것은 일명 마스까찌 (Mascate)라고 불리던 집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상인인 벤데돌이었다. (편집자 주: 여기까지 보면, 우리 한인들이 브라질 처음으로 이민을 올 때 하게 되는 각종 의류업의 벤데와 비슷함이 있어, 흥미로웠다).
돈유로 일군 첫 비즈니스
그는 이민 초기 계획은 돈유를 가져와 유통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브라질에서의 식용 기름 소비는 돈유 중심으로 미국에서 수입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돈유는 나무 각에 포장이 되어 판매가 되기 때문에 보존성도 낮았고, 수입 제품이다 보니 가격도 비쌌었다. Matarazzo는 Sorocaba 근방에서 돼지들을 사 직접 돈유를 추출하여 철통에 소량으로 포장하여 판매 하였고, 판매는 급파르게 성장을 했다. 그렇지만, 어떤 비즈니스와 마찬가지로, 진입장벽이 낮으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법,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경쟁자가 생기게 시작되어, 대책이 필요했다.
그의 비즈니스를 살펴보면, 그 여느 사업가와 마찬가지로 과감하고 스케일이 큰 결정은 한다. 그렇게, Matarazzo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결정을 한 것은 바로 돼지들의 전량구매였다. 그것도 Sorocaba 지역의 양돈농가의 돼지들을 지속해서 삼으로, 안정적인 원자재 확보로 인한 지속적인 생산 가능과 고정 비용 절감으로 확실한 승기를 잡게 되었다.
25 de Março에서의 상점과 밀가루 사업
상파울루 지방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Matarazzo는 더 큰 시장을 노려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에겐 매우 친근한 25 de Março에서 상점을 열게 된다. 당시 상파울루는 지속하는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구가 지수적 성장을 하고 있었고, 점차 주요 비즈니스 기회가 이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특히나, 1892년 산토스 항의 개항은 수입 제품들이 상파울루로 빠르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고, 그는 이때다 싶어, 새로운 비즈니스를 개척하기로 결정한다.
이미 식품업을 하고 있던 그에겐 브라질의 식품 산업의 사정은 매우 익숙해 있었다. 당시 브라질에는 많은 유럽인이 이민을 오고 있었고, 이들과 함께 늘어난 수요는 바로 밀가루이다. Matarazzo는 미국으로부터 밀가루 수입을 시작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통찰력이 빛나게 된다.
중남미 정세는 매우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었고, 미국과 스페인은 쿠바의 주도권을 갖고 다투고 있는 모습을 본 그는, 곧 양국 간의 전쟁이 올 것이라 예상을 하게 되어 조만간 미국 밀가루의 브라질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모두가 말렸지만,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밀가루를 독점하다시피 수입을 하게 되었고,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스페인과 전쟁을 시작하여 그의 예상대로 브라질에 밀가루 공급이 중단되게 이른다.
밀가루 사업으로 퍼진 다양한 사업 진출
아르헨티나에서 밀가루를 수입해 큰 성공을 거둔 Matarazzo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도전을 한다. 그것은 브라질내에서 식품공장을 세우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설비 설치하고 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반은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영국 은행들로부터 어렵게 대출을 받은 그는 Pari에서 밀가루 공장을 만들어, 이제는 브라질 내수 시장을 비롯해 주변 국가에도 수출하는 상인이 아닌 사업가로 크게 변신을 한다.
자신감을 얻은 Matarazzo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밀가루 사업과 연관된 품목들을 국산화를 하였고, 이차적으로 동일 재료로 생산되는 제품들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비롯된 상품들은 정육, 천, 화장품 (비누), 설탕 공장, 청소제품, 철공장, 등. 그가 세계 7대 부호가 되기 위한 바탕이 되었다.
이어지지 않은 유산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이름을 가진 상표를 포함해 그의 회사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총 6남 7녀의 자녀가 있었던 그는 자신의 후계자로 일찍이 삼남인 Ermelino Matarazzo을 지목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1920년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어, 5남인 Francesco Matarazzo 2세, 일명 Chiquinho에게 사업을 물려주게 된다. 그렇지만, 1대에서 2대로 후계과정은 매끄럽지 못하였고, 여러 갈래로 가족 간의 분쟁을 겪게 되었다.
2대인 Chiquinho Matarazzo는 약 40년간 IRFM (Indústria Reunida Francisco Matarazzo – 프란세스코 마타라조 종합산업)을 경영했지만, 어마한 규모로 커진 대규모 사업을 운영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부채도 많이 생겨났었다. 그나마, 당시의 브라질의 경제가 폐쇄적이라 일부 비즈니스에서 나름 선방을 했지만, 그 역시 3대로 넘어가는 후계 과정에서 큰 진통을 겪어, 가족 간의 분쟁을 막지 못한 채 막내딸인 Maria Pia Matarazzo에게 물려준다.
3대인 Maria Pia가 맡았을 때는 이미 기업은 많은 부채를 떠안고 있었고, 외부환경 역시 우호적이지 않았다. 당시, 브라질에는 다양한 다국적 기업들이 브라질에 진출한 상태라, 단순히 자국에서 생산이 되는 상품이라고 해서 판매가 되지 않아, 결국 Matarazzo의 기업은 1983년 파산에 이른다.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이 작은 글에 담기엔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불가능하나, 브라질 제1공화국 때, 그의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빠질 수 없어 가져왔다. 브라질에서 제일 돈이 많았던 사업가 Matarazzo 이탈리아 이민자로서 브라질 산업을 맨손으로 일군 사업가 중에 한 명이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