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지난 4월 유퀴즈온더블럭에선 유진 벨 (Eugene Bell)의 5대손인 데이비드 린튼, 한국 이름 인대위의 인터뷰가 있었다. 한 번쯤은 들어본 가문의 이름이었지만, 그들의 삶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해, 방송 내내 놀랍고 또 놀라웠다. 필자가 이들의 삶을 보면서 놀란 이유는 외국인으로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라를 위해 헌신을 한 이유도 있겠지만, 이들의 세대들을 보면서, 선교사의 소명으로 시작된 삶이 못 사는 나라를 위한 사명으로 진화되어 그들의 이민자 정체성 구축되는 것이었고, 또한 그들의 삶이 모든 이민자에게 교훈으로써 전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세대 유진 벨 (Eugene Bell – 한국명: 배유지 – 1868~1925)
미국 켄터키주에서 출생하여 1895년 한국에 선교 목적으로 입국하였다. 당대에 활동했던 언더우드와는 달리, 유진 벨은 지방 선교를 했었고, 이들은 교육과 의료 사업을 중심으로 벌였다. 특히 유진 벨은 여러 학교를 설립 했다. 그의 첫째 부인인 로테 사모는 32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고, 서울 양화진에 묻혔다. 그의 둘째 부인인 마가렛 벨은 1919년 광주에 돌아오다가 열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유진 벨은 격무와 과로로 1925년 57세 나이로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2세대 윌리엄 린튼 (William Linton – 한국명: 인돈 – 1891~1960)
유진 벨의 딸인 샬롯 벨과 결혼을 한 윌리엄 린튼은 1903년 John Fairman Preston (한국명 변요한) 선교사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주 지역을 거쳐 목포로 도착해 선교 활동을 시작 했다. 그는 군산 영명 학교에서 한국어로 성경을 가르쳤고, 1917년엔 해당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19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1운동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실제로 일본 경찰은 그의 교회에서 독립선언서 등사본 2000매를 발견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학교들을 폐쇄하기 이르렀고, 미국에선 선교사들의 보호 차원으로 집단으로 그들을 철수토록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윌리엄 린튼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폐교한 학교들을 복원하는 데 노력 했고, 1959년엔 대전 대학교 (현재의 한남대학교)의 설립을 했다. 다만, 아쉽게도 1948년에 발병한 직장암에 이어 1959년 암이 재발하여, 결국 그다음 해에 자신의 차남이 일하고 있던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에서 삶을 마감 한다.
3세대 휴 메킨타이어 린튼 (Hugh MacIntyre Linton – 한국명: 인휴 – 1926~1984), 드와이트 린튼 (Dwight Linton – 한국명: 인도아 – 1927~2010)
유진 벨도 그렇고 윌리엄 린튼의 모든 가문이 한국에 계속해 거주하면서 그들의 철학, 사명 그리고 유지를 이어간 것은 아니다. 3세대는 윌리엄 린튼가의 셋째와 넷째 아들들이 이어갔었는데, 이들 역시 선교를 중심으로 교육과 의료 사업을 이어갔다. 특히 휴 린튼의 아내인 로이스 (인애자)는 결핵 퇴치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다. 이들은 1965년 입원 요양이 필요한 결핵 환자의 진료를 위해 결핵 요양원을 설립 했다. 특히, 로이스 선교사는 35년간 결핵 퇴치를 헌신하다가 1994년 은퇴 후, 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호암상을 받았는데, 이때 받았던 상금 오천만 원은 자기 아들인 존 린튼 (인요한) 박사에게 기부가 되어 앰뷸런스를 제작하는 데 보탰다.
드와이트 린튼도 선교에 이바지 했다.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군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지만, 평양에서 자랐다고 하며,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미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후 광주에서 20년 넘도록 의료봉사를 했고, 은퇴한 뒤에는 90년대 초반 북한 주민 돕기 프로그램인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 (Christian Friend of Korea: CFK)`를 설립했다.
4세대 스티브 린튼 (Stehphen Linton – 한국명: 인세반 – 1950~ 현재)와 존 린튼 (John Linton – 한국명: 인요한 – 1959~ 현재)
4세대부터는 오히려 미국 이름보단 한국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인세반은 11년 전 브라질에 와서 강연했었다. 현재는 북한의 인도적 지원 사업을 하는 유진벨재단의 회장으로 있는데, 79년 평양 방문을 통해, 북한과의 사업을 주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인 존 린튼, 인요한은 대중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 휴 린튼이 안타깝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이송할 구급차가 없어, 택시 안에 돌아가신 이후, 한국의 구조 시스템에 관심을 두고 전국 소방서와 병원에 3천 대가 보급된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했다. 당시의 앰뷸런스를 미국에서 가져오려고 했는데, 한대를 보급 하는데 약 8천만 원이였다고 해서, 기아의 베스타를 개조해서 만든 게 바로 한국형 앰뷸런스다.
선교로 시작해 가문과 삶의 사명으로 이어진 그들의 이야기
유퀴즈에 나온 인터뷰는 5대 데이비드 린튼이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선조들과는 다르지만, 그 역시 한국인으서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 가문과 한국과의 연은 선교라는 틀이 맺어주었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은 소명에서 사명으로 그리고 지금은 가문과 문화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뿌리가 깊게 박혀 있다.
이들은 보면서, 우리 교민사회를 생각해 본다. 이미, 우리 사회는 2세대가 주축이 되어가고 있고, 몇 년만 지나면 3세대가 조금씩 활동적인 시대가 온다. 2세대인 윌리암 린튼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살았었다. 장인과 더불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고 온 조선이라는 땅에서, 그마저 교육사업을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본 식민주의에 맞섰고, 3.1운동 지원과 이 땅에 교육이 뿌리를 잡기 위해 열정적인 활동을 하다가 암을 얻어 돌아가셨다. 3세대와 4세대는 선조들의 뜻을 이어 결핵 퇴치, 앰뷸런스 사업들을 통해 계속해서 지역사회에 이바지 했다. 특히, 린튼가는 다른 선교 가문과 다르게, 지역사회에 주된 활동을 했다.
지금 우리 한인사회에 필요한 건 바로 이런 시대정신 확립과 세대 간의 교체 작업 그리고 한국계 브라질인 (Coreanos Brasileiros)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 정립이라고 감히 제언한다.
칼럼저자ㅣ 이재명 (브라질 100대 혁신스타트업에 선정된 CrediGO의 CMO 마케팅 임원)
▲OKTA 홍보마케팅 위원장 ▲FIAP 디지털 마케팅 대학원 수료 ▲마켄지 광고홍보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