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úlio Vargas (1882-1954)은 브라질의 17대 대통령이다. 많이들 바르가스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군 출신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농부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난 바르가스는 군대를 다녀온 민간인 (예비역 중사 – Sargento) 으로 히오 그란지 두 술 연방대학교 (UFRGS) 법대를 졸업 했고, 대학 시절부터 운동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인이 되기전에는 잠시나마 검사와 변호사 생활을 했었다.
정치인 바르가스의 등장
바르가스는 1909년 히오 그란지 두 술 주의원으로 당선이 되면서 정계에 데뷔한다. 이후 연방하원의원직을 거쳐 Washington Luis 정권에서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뒤에 1928년 히오 그란지 두 술 주지사로 당선이 된다. 그의 정치 프로필에 대해선 많은 전문가는 탁월한 협상을 꼽을 정도로, 그는 분쟁을 조정하는 능력을 보유했다. 그래서 그런지, 까페 꽁 레이찌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인 Washington Luis가 기존의 룰대로 후임 정권을 미나스 출신이 아닌 상파울루 출신을 추천하자, 미나스공화당 (PRM)이 다른 당과 연합하여 대항마로 내세운 후보가 바로 바르가스였다.
선거에서 패하자, 이들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쿠데타가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 그룹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커피 기득권 세력에서 빠져나온 반대파 엘리트층이었고, 두 번째는 상파울루 공화당 (PRP) 을 제외한 주요 정당들인 미나스 공화당, 군소정당, 그리고 젊은 장교들의 연합인 Aliança Liberal의 지원이었다.
1930년 초반: 혼란의 연속
1930년에서 1934년까지는 임시정부라고 불린다. 이는, 1934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서, 브라질은 제2공화국 시대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과정은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았다. 1932년에는 바르가스의 쿠데타에 대항해 상파울루가 주축이 되어 마또 그로소, 미나스 제라이스, 히오 그란지 두 술의 일부 세력들과 연합해 혁명전쟁인 Revolução Constitucionalista de 1932을 일으켰지만, 패배하였고, 각지에선 작은 전쟁들이 발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발을 나름 격변에 시기이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상파울루가 갖고 있던 영향력에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상파울루는 산업화 선두에서 많은 산업이 생겨났었고, 당시 경제의 중심인 커피 농장들도 상파울루에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다 보니, 경제와 관련해서 바르가스 정부 초기에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 시기에 취할 수 있었던 정책은 소수를 위해 운영이 되던 커피 정책을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하기 위해 국가커피청 (Departamento Nacional do Café)와 카카오 재단 (Instituto do Cacao)을 만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커피 가격을 유지하기 위한 태우기 정책은 유효했고, 1930년도 초반에는 수출 물량과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태웠다.
1934년 헌법 제정과 강력한 중앙 정권
1933년 전쟁이 끝나자, 바르가스는 제헌국회를 구성해, 새로운 헌법을 준비한다. 제2공화국의 헌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유하게 되며, 이 중 일부는 아직도 유효하다:
1. 비밀투표 도입과 여성의 투표 참가: 제1공화국 선거 방식은 남자 성인 21세 이상에 군인, 종교인, 문맹인을 제외한 공개 투표라서, 지역의 주요 유지 (Coronéis)의 영향이 매우 강했었다. 따라서, 비밀투표 도입은 유권자 자유를 보장 했고, 여성의 투표 참가는 투표권의 확대를 의미 한다. 다만, 성인 18세 이상부터 참여는 가능했지만, 여전히 문맹인은 투표를 참가 할 수 없었다.
2. 노동재판소 및 선거재판소 창립
3. 자원, 은행 및 보험업의 국유화
4. 노동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
5. 은행 및 보험업의 국가화
6. 노동자에 대한 책임
그리고 언론이다. 바르가스 정부의 특징은 과도한 정치 홍보로 유명한데, 이것을 다른 독재정권들과 비교를 하면서 Varguismo 또는 Getulismo라고 불렀다. 새로운 헌법으로 노동자의 기본권이 보장되자, 바르가스는 큰 인기를 끌 게 되었고, 정부는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1931년 홍보처, 1934년 홍보문화처을 거쳐 1939년 언론 및 홍보처인 DIP를 만들었다. DIP는 Departamento de Imprensa e Propaganda (언론 및 홍보부)의 약자로 정부의 활동들을 당시의 대중매체였던 라디오를 통해 적극적인 홍보를 하였다.
노동법의 제정
그리고 지금의 브라질에 큰 영향을 끼치는 법 중 하나인 노동법을 바르가스 정부가 제정하게 된다. 이미 새로운 헌법을 통해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역할과 책임을 정한 바르가스 정부는 본격적인 노동 개혁을 단행한다. 대표적으로 최저임금 도입, CLT (통합 노동법), 노동재판소와 노동조합의 창설들이 있다.
최저임금: 1930년 Cesta Básica (기초 생활 물품)의 10개에 해당하는 비용을 임금으로 지급 해야 한다는 게 기초 제정 사항이었고, 이후 1936년, 1938년 조례안들로 강화된 뒤 1940년 최저임금을 금액으로 법제화하게 된다.
CLT (Consolidação das Leis do Trabalho – 통합 노동법): 노동자가 근무하기 위한 조건과 고용자의 의무를 법으로 제정한 것이다. 1943년 법으로 제정되었는데, 많은전문가들은 이 법은 이탈리아 파시즘을 창시한 무솔리니의 Carta del Lavoro (노동법)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비판적인 시각으로는 전적으로 노동자의 측면에서 만들어진 법으로, 브라질 노동자의 생산성을 낮춘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노동재판소: 지금도 일부 극소수의 선진국에만 존재하는 재판소로, 노동과 관련된 재판을 진행하는 재판소이다. 브라질 같은 경우는 총 24개의 지방 노동재판소 (TRT) 가 있으며, 상위 법원으로는 최고 노동재판소 (TST) 가 있다.
이외에도 1930년 노동부를 새롭게 만들어, 노동과 전반 된 모든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콘트롤 타워를 만들어, 바르가스 정부의 특징은 강한 행정부를 대변 하였다.
노동조합(노조)의 정부 세력화
바르가스 정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바로 노조에 대해서이다. 바르가스는 1930년 노동부를 만들어, 노조 창설 허가권과 관리권을 갖게 하여, 모든 노조는 정부의 관리하에 운영이 되고 있었다.
특히 노조를 운영하기 위해선, 노동자로부터 운영비를 의무적으로 CLT를 통해 지급하게 하였다. 결국에는 이러한 정부와의 고리로 인해, 노조는 단순히 노동자를 대변하는 단체가 아닌, 정부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단체들이 되었고, 노조의 숫자는 중앙에 몇 개가 있는 것이 아닌, 각 산업에 맞춰 다양한 노동조합들이 생겨나서, 지금은 약 1만6천 개의 노조가 존재한다 (세계 1위).
지금의 노동부(현재는 경제부와 통합)는 이러한 권한들이 없지만, 당시 노동부가 갖고 있었던 권한들을 살펴보면 (1) 노동부의 노조 정기회의 참가; (2) 노조의 재정 컨트롤 – 파업 시 재정 투입 불가; (3) 노동자의 국제노동조합 가입 불가; (4) 노조는 정부의 공식 협력 관계 유지들이 있었다. 노조의 숫자는 법이 제정되었던 1931년 32개에서 1938년 1,133개로 지수적 성장을 하였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