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경제 2막이라고 불리는 백금 설탕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고, 포르투갈 역시 이베리아 연합 해체로 또 다른 활로를 찾아야 했다. 특히,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그들의 배를 아프게 했고, 브라질에서도 무한의 기간을 갖고 금을 찾으라는 왕명을 내리곤 했었다.
1600년대에 브라질로 이주한 포르투갈 정착민들인 Bandeirantes들은 금을 찾는 데 주력을 했지만, 역사가들에 의하면 이들은 이미 금이 어디에 있었는지 대략 알았지만, 손쉽게 왕국에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식민지에서 발견되는 천연자원은 왕국의 소유권이다’라는 법령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일부는 금을 발견하면 고스란히 이베리아 연합의 주도권을 갖고 있던 스페인에 돌아가기 때문에 쉬쉬하였다고 한다. 결국, 1640년 이베리아 연합이 해체되는 시점을 이후로 금과 관련된 정보가 지속해서 보고되었고, 1679년에는 포르투갈의 섭정자였던 동빼드로 2세는 브라질에 있는 포르투갈인들에게 “포르투갈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오직 금만이 이 문제를 극복 할 수 있다” 라는 편지를 쓰게 된다. (Eduardo Bueno, 2013)
세계 무역의 중심에 다시 서게 된 브라질
브라질은 세계 무역에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탕이 귀했을 당시 브라질에서의 설탕 생산은 어마어마했고, 이제 금으로 그 새로운 시대를 써가게 되었다. 바로, 18세기의 금과 다이아몬드의 생산의 절반은 바로 브라질에서 생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비중을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 번째는 브라질 금의 생산 중심이었던 Ouro Preto 이다. 이 도시는 현재 역사적인 가치로 인해 1980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지금도 도시를 방문하면 곳곳에 당시의 웅장함을 상징하는 건출물들과 교회,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있을 정도로, 식민 브라질에 첫 문화를 안겨주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금을 향한 여정으로 인한 인구 증가였다. 금광이 발견되는 1690년 브라질의 인구는 약 30만 명에서 1798년 거의 11배가 증가한 325만 명이라고 했다. (Contreiras Rodrigues, 1935). 참고로, 당시에 유입된 아프리카 노예만 약 100만 명이라고 한다. (Laurentino Gomes, 2018).
그렇게, 금광의 시대는 브라질에서 조금씩 내수 시장의 성장을 돕기도 했었지만, 그 기간이 매우 제한적 (역사가들은 50년에서 70년으로 봄)이었고, 포르투갈은 오히려 금으로 얻은 부를 영국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기 위해 사용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포르투갈의 무역조차도 영국의 관리.감독하에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포르투갈과의 독점무역이었던 식민 브라질은 본토의 발전을 위해, 단 한푼도 식민지의 개발을 위해 쓰여진것이 하나도 없어, 지난 빠우 브라지우처럼 탈탈 털린 초라한 모습으로 이 시기를 지나게 된다.
계몽시대와 1차 산업 혁명
지속되는 노예들의 유입으로 브라질은 명실상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부와 권력을 갖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은 히우 데 자네이루로 몰리게 된다. 당시의 노예무역으로 얻은 부는, 유일하게 본국인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고, 고스란히 식민브라질에 남게되어, 이들 비즈니스맨은 실질적인 브라질의 기득권층이되어간다. 그리고, 1763년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부국이 되어, 부왕(副王)들이 생기지만, 이들이 왕과 동일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보긴 그렇고, 주 단위로 있었던 총독제 (Governo-Geral)을 명칭을 대체를하였다고 보면 된다.
이때의 영국은 계몽시대 중심으로, 정치와 사회의 발전에 대한 사상가들의 깊은 고민들이 생겨났고, 경제 철학에 대한 생각은 사회의 발전과 개발을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고려가 되었다. 즉, 국가가 어떻게 부를 형성을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바로, 국가와 국민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 여겨졌다. 이런 사상을 처음으로 꺼낸 것이 바로 영국인이자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 (1723-1790)이다.
증기기관을 기반한 제1차 산업 혁명은 이제 인간의 노동은 단순 물리적인 것을 떠나, 애덤 스미스가 주장 하던 것처럼 생산성을 중심을 하는 대량화가 가능케 되었다 (핀셋 이론). 특히 세계의 국민소득은 지난 3천 년간 큰 증가 없이 정체되어있었던 반면, 18세기엔 급속도로 성장을 하여, 대 분기가 일어난다.
사회적으로 가난한 브라질: 미국의 독립, 프랑스의 혁명 그리고 찌라덴찌쓰
1776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부당한 세금에 반발해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지배국가에 대해 독립을 하게 되었고, 1789년에는 프랑스의 혁명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이 두 개의 역사적인 혁명에 대해 포르투갈 매우 경계를 하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은 국민들이 가난해지는 문제를 포함해 자유와 평등을 주장해 귀족들과 교회 부를 나누게 한 것은 매우 충격이었다.
바로 그 해에, 브라질에서는 찌라덴찌쓰가 잡혀가고 있었다. 우리에겐 휴일인 4월 21일 또는 봉혜지로 지하철역의 이름으로 친근한 찌라덴찌쓰의 본명은 Joaquim José da Silva Xavier으로 Inconfidência Mineira (미네이라 혁명)을 주도한 일원 중 한 명으로서, 당시 미나스에 집중된 금 광산 개발에 대한 과도하고 집요한 세금 징수에 대해 저항을 했었다. 특히, 미나스는 포르투갈 왕국으로 세금 탈세에 대한 처벌로 Derrama를 집행했는데, 이때 1,500kg의 금을 징수 해갈 정도로 매우 잔혹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것은 1755년 리스본에 일어난 지진으로 1763년 금광의 생산이 나날리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국은 다시 한번 Derrama를 집행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바로 미나스 제라이스 공화정이었다. 다만, 이것은 브라질 전체를 N 등분을 하는 것이 아닌, 독자적인 공화정이었으며, 당시의 미국 혁명 역시 이들의 꿈에 큰 동기부여를 주었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당시 찌라덴찌스와 함께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에선 그가 가장 과격했기 때문에, 11명 중 유일하게 사형에 집행되었다고 전하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유일하게 참형을 당한 것은 그의 신분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당시 11명 중에는 법조계, 종교계, 농장 주인들이 참여를 했었다.
그렇게 18세기 말의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엄격한 통제 속에 학교도 제한적이며 소수에게만 해당하며, 대학교와 도서관, 신문과 책의 출판이 금지되었고,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선, 오로지 포르투갈 왕정의 허가하에 가능했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제조업을 할 수 없었다. 결국 1500년 Cabral이 브라질을 발견했던 그 모습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던 모습이었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 2021년 브라질 중앙은행 혁신프로그램 (LIFT Lab) 선정, 2020년 브라질 100대 혁신스타트업 선정. 마켄지 광고홍보학과 졸업, FIAP 정보마케팅 대학원 수료,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