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5월 Veja (주간잡지)에서 충격적인 인터뷰가 진행된다. 바로 꼴로르의 동생인 빼드로 꼴로르 지 멜루 (Pedro Collor de Melo)가 꼴로르 정부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의 공개 발언에서는 꼴로르 대선캠프에 재정을 총괄했던 사업가인 빠울로 세자르 파리아스 (Paulo César Farias)가 여러 가지 사건에 연루가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그는 허수아비일 뿐, 뒤에는 페르난도 꼴로르 대통령이 있었고, 이들은 약 1억 달러의 규모의 공적자금이 이들의 계좌에 흘러갔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탄핵 과정은, 인터뷰가 발간된 지 1달 만에 의회에선 ‘PC 작전 (Esquema PC)’ 청문회가 설치되며, 대통령 동생인 빼드로 꼴로르가 직접 참석해 정부 내에서 조직적인 부정부패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을 한다. 이미, 연이은 경제정책 실패로 꼴로르의 지지율은 91년부터 30% 미만이었고, 그의 동생의 인터뷰는 결정타로 다가온다.
국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시민들과 학생들은 얼굴에 노란색과 초록색의 물감을 칠해 거리에 나서 ‘Fora Collor (꼴로르 퇴진)’을 외쳐 꼴로르의 하야를 대대적으로 요구한다. 6월에 설치된 청문회는 85일의 대장정을 마치고 ‘대통령 꼴로르는 언론에 제기된 부정부패 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라는 결론으로 보고서가 채택되어 탄핵 일정이 시작되었고, 9월에는 브라질 언론인협회, 브라질변호사협회 그리고 법률가 2인들의 요구로 탄핵안이 설치되, 12월 29일 꼴로르는 대통령직으로 탄핵이 된다. 이렇게 여러 차례 군사 쿠데타 이후 선출된 첫 민간인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받들어 의회와 사법부의 시스템을 통해 합법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직에서 제거가 된다. 꼴로르의 탄핵은 부패 문제가 결정적이었지만, 연이은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한 낮은 지지율이 국민을 움직이는 데 충분했다.
이따마르 프랑코 경제팀: FHC (페르난도 엔히끼 까르도소)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이따마르 부통령은 자기주장이 뚜렷한 신념이 있는 정치인이다. 그는, 부통령 시절 몇 차례 꼴로르와 공개 출동을 가진 적이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자신의 정치 텃밭인 미나스에 있던 국영기업 Usiminas의 민영화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의 경제지향점은 자유주의 경제 아젠다로 당선된 꼴로르에 비하면 매우 진보적이었고, 노동자 그리고 저소득층의 소득 증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따마르가 대통령직 승계가 분명해지자, 의회에선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 상원의원이던 PSDB의 FHC (페르난도 엔히끼 까르도조)는 이따마르에게 국가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기 위해선 통합정치를 해야 한다고 조언하며, 꼴로르 내각에서 참여를 안 했던 제1야당인 PMDB와 PSDB을 내각에 참가시킨다.
PMDB의 내각 참여는 결정적이다. 꼴로르때는 여소야대 정국으로 초반에는 자신의 높은 지지율로 의회를 장악했다면, 지지율이 빠지자 정부는 개혁동력은 빠르게 잃게 되어 탄핵까지 되었지만, 이제는 PMDB의 참여로 여당이 의회에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따마르 경제 사령탑은 초반부터 매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 장관으로 선정되는 인물은 특정 정책이나 이론을 가진 인물이 아닌 연립 정부의 한 축이었던 PFL (자유운동당 – 현 União Brasil) 출신의 구스따보 끄라우세 (Gustavo Krause)이다. 끄라우세는 법률가이자 정치인으로 3개월만에 사임을 하고, 후임으로는 이따마르의 이너서클 (Inner Circle – 내부 핵심층)이었던 Juiz de Fora출신의 빠울로 호베르또 아다지 (Paulo Roberto Haddad)가 임명된다. 아다지도 4개월 만에 교체가 되며, 그의 후임인 엘리제우 헤센지 (Eliseu Resende)도 2개월 만에 해임이 된다. 이렇게, 3명 장관이 단명한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끄라우세는 대통령이 다양한 경제 전문가들과 새로운 정책개발이라는 이야기가 언론에 나오자 사임을 했고, 빠울로 호베르또 아다지는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만들려고 하다가 대통령과 부딪혀 사임했고, 엘리제우는 불과 2달 만에 오데브레찌 (Oderbreth) 건설사의 로비설로 인해 사임한다.
이렇게 3명의 장관이 연달아 사임하자, 이따마르는 안전한 대안이 필요했고, 그는 즉시 외교부 장관이었던 페르난도 엔히끼 (FHC)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이따마르는 실제로 왜 FHC를 지목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다만, 외교부 장관으로 직책을 매끄럽게 수행하고 있었던 점과 웬만한 정치인들로부터 합리적인 인사라고 평가받았던 FHC였기 때문에, 가뜩이나 대외적으로 큰 도전과제에 있었던 경제팀에 동기부여와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순간들을 수습하기엔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판단이 된다. 여기서 두 가지 상황을 더 붙인다면, 1985년부터 브라질 경제팀은 경제 또는 비즈니스 사회에서 명망이 있던 인물들을 임명해왔지만, 이들 모두 항상 실패했기 때문에, 이따마르는 단지 전문가라는 이유로 신뢰하고 있지 않아 정치인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해 혼란스러운 경제 상황을 수습했었다. 두 번째는, PSDB내에서도 경제정책을 오랫동안 토론하고 준비를 해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앞서 전한대로, 조세 세하 하원의원이 젤리아 장관 후임으로 입각 가능성이 생기자 매주 토론회를 열어 새로운 정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62세 사회학자이자 종속이론의 대가였던 FHC는 상원의원으로 외교부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도 많이 알려진 일화는 그가 어떻게 이따마르에게 재무부 장관직을 제의 받게 된 것이다. 1993년 5월 미국 공식 방문 중에 있던 FHC는 미국 브라질 대사관저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 이따마르의 전화 통화를 받은 것이다. 이때 이따마르는 단도직입적으로 FHC에게 재무부 장관직을 맡아달라고 했고, 그는 “본인은 경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라며 거절을 했다. 그리고 FHC가 브라질로 귀국하자마자 재무부 장관직에 임명되어 언론은 집요하게 어떻게 물가를 잡을지를 질문한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인 FHC는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며, 세계은행에서 외채를 협상하던 말란에게 전화를하여 끄루자도 정책에 주역들의 연락처를 묻게 된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