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1989년 대선의 열기는 뜨거웠다. 국민들은 1960년을 마지막으로 선거에 참여했었는데, 당시 약 1,300만 명(국민 19%)이 선거에 참여를 한 반면 1989년에는 8,200만 명의 국민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89년 브라질 인구가 1억 4,700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국민 전체의 55%가량이 참여했다. 총 22명의 후보가 나선 대선에선, 명망이 높았던 PMDB(브라질민주운동당)의 울리쎄스 기마라엥스, PMDB에서 탈당해 창당된 신생정당 PSDB(브라질사회민주당)의 마리오 꼬바스, 군정시대에 상파울루 주지사를 지냈던 빠울로 말루피, 노동정치의 대부이자 장고(조엉 굴라트 전 대통령)의 처남이었던 PTB(브라질노동당)의 브리졸라, 그리고 노동계의 신진리더였던 PT(노동당)의 룰라까지 출마해서 1차와 2차 결선투표로 치러졌다.
<1989년 대통령 선거 결과 – 1차>
이름 | 이념 | 득표율 | 비고 (출마전 최종 경력) |
페르난도 꼴로르 | 중도, 중도-보수 | 30.47% | 40세, 알라고아스 주지사 |
룰라 | 진보 | 17.18% | 44세. 하원의원, 노조 지도자 |
브리졸라 | 진보 | 16.51% | 67세. 히우 지 자네이루 주지사 |
마리오 꼬바스 | 진보, 중도-진보 | 11.51% | 59세. 상파울루 주 상원의원 |
빠울로 말루피 | 보수 | 8.85% | 58세. 상파울루 주 하원의원 |
비고: 이념은 정당의 강령과 당헌에 따라 정리함.
1차에서는 놀랍게도 선거기간 내내 정치 개혁을 외친 꼴로르가 1위로 결선에 진출했고, 룰라는 간소한 차이로 브리졸라를 눌러 꼴로르과 2차에서 겨루게 된다. 브리졸라와 꼬바스는 결선에 진출한 룰라를 지원하게 된다. 2차 결선 투표에서는 총 6,616만의 유효표에서 53.03%를 획득한 꼴로르가 이기게되어, 브라질의 제32대 대통령이자 29년만에 문민 대통령으로 선출이 된다.
무명에 가까웠던 그가 당대의 정치 지도자들을 모두 누르고 당선된것만으로만 봐도, 국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후보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하는 것에 희망을 품었고, 정치도 경제도 곧 안정권으로 갈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꼴로르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알라고아스 언론계의 지주로서 대단한 언변가였고, 실제로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매우 절제되어있고 격식이 높은 단어들을 주로 사용 했다.
무역의 개방과 민영화 정책
꼴로르는 취임하자마자 PICE (무역 및 산업 정책)을 통해 무역 개방정책을 총괄토록 했고, 또 PND (국가민영화계획)을 출범시킨다. 무역 개방은 경제 정책인 「Collor I」에 포함된 정책으로 단계적으로 수입 제품들의 제한 해제와 특정 분야 수입세의 절감을 하는 것이다. 1990년 수입세가 대략 40%였다면 1년이 지난 1991년에는 20%로 떨어졌고, 자동차 수입세는 약 85%에서 59%로 떨어지게 된다. 여기서 PICE의 핵심 원리는 ‘당근과 채찍’의 논리로, 자국 산업을 자극하기 위해 수입 제품 허용으로 채찍을 주되 정부는 R&D (연구개발)을 지원하면서 당근을 동시에 공급하여 산업을 가속화 한다는 논리였다. 실제로 1989년 브라질의 R&D 투자 비율은 GDP에 0,5%였는데 1994년이 되자 1,3%로 오르게 된다.
민영화 정책은 재정 사정이 여의찮았던 정부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때 당시만 해도 브라질은 모라토리엄으로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잃어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들과 지속적인 외채 협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적으로 돌파구가 필요했었고, 너무 오랫동안 많은 국영기업을 유지한 터라 민영화의 시기도 매우 적절했었다. PND는 총 68개의 국영기업을 민영화한다고 발표했고, 여기서 꼴로르 임기 내에 끝내지는 못했지만, 대표적으로는 Embraer (항공기 제조사)가 1991년도에 시작돼 1994년도에 민영화가 완료되었고, Usiminas (광산업)도 민영화가 된다. 민영화로 인해 꼴로르 정부는 총 40억 달러의 자금을 확보하였고, 13억 달러의 부채를 넘기게 된다. 이 규모는 당시 GDP에서 1%가 조금 넘는 규모였다.
경제: 「Collor I」과 저축통장의 압류
꼴로르는 선거 때부터 자신을 보좌를 해왔던 37세 USP 경제학 교수 출신인 젤리아 까르도소 지 멜루 (Zélia Cardoso de Mello)를 새 경제부 장관으로 발표한다. 젤리아는 70년대 후반부터 주요 은행의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했고, 1981년도에는 런던 브라질 대사관에서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한 뒤에 80년대 중반에는 상파울루 주정부에서 활동 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경제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정부 조직을 조각했다는 점이다. 당시, 내각은 재무부가 재정, 통화, 금융 정책을 담당하고 기획부에선 경제개발과 관련된 정책을 펼쳤는데, 꼴로르는 재무부, 기획부, 산업통상부와 농업부의 일부를 통합시킨 경제부를 출범시킨다. 그리고 3월 15일 발표하고 1달도 안 돼 의회에서 「Collor I」 법안이 통과된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정부는 월 80%의 인플레이션을 멈추기 위해 (1) 시장의 통화량을 줄여, 소비자의 구매력을 억제한다. (2) 정부의 재정적자를 줄일 것이다. (3) 물가 조정 지수 폐지라는 3가지 대원칙을 발표한다. 통화량을 줄이는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의 근본적인 원인을 공격하겠다는 의지다. 이전 정책들은 단순히 관성인플레이션의 논리로만 접근해, 가격동결이 주된 무기였다면, 통화량을 줄이는 것은 소비를 억제하여 수요를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시도되는 통화정책은 이론상 의미 있었지만, 그 방법은 매우 과격했다. 먼저, 기존 화폐였던 끄루자도 노보를 유지하면서 끄루제이루를 도입을 한다는 것인데, 정부는 저축통장에 5만 끄루자도 노보 (NCz$ – 당시의 통화)가 있는 사람들은 18개월간 출금을 제한하였으며, 해당 통화량은 끄루제이루로 12번으로 나눠 1991년 8월부터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5만 끄루자도 노보는 1990년 3월 기준 약 1,300불 수준이다).
젤리아 경제팀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 브라질에서 은행 계좌를 갖고 있던 국민들의 숫자는 적었을뿐더러, 약 90%의 계좌가 5만 끄루자도 노보 이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 결과는 최악이었고 시장의 반응은 혼란에 연속이었다. 먼저, 이를 대응을 하는 은행들조차도 하루아침에 밝혀진 정책에 대한 이해도도 낮을뿐더러,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고, 돈을 출금하기 몰려오는 성난 무리들은 각 가지 개인적인 사정을 대면서 더 많은 돈을 출금하길 요구하곤 했었다. 세계는 이와 비슷한 개인의 유동성인 현금 자산의 압류 정책을 경험한 적이 몇 번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2차 대전이 끝난 동독을 비롯한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통화량이 급진적으로 멈춰 월 80%대의 물가는 10% 미만으로 하락하긴 했었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과격했기 때문에 시장은 빠르게 위축되었고, 원활한 자금 흐름이 없었던 기업들은 규모와 상관없이 파산 하였고, 그중에서 자영업자들은 극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특히, 환율은 물가와의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구스따보 프랑코 전 중앙은행장은 「Collor I」은 마치 정부가 무인(無人)과의 전쟁을 멈춘 뒤 전쟁 상대가 없어 국민들과 전쟁을 시작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