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제2차 끄루자도가 효과도 내기 전에 시장은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정책 발표 한 달 뒤의 물가지수 때문이다. 첫 30일이 지난 뒤의 인플레이션은 월 7.6%를 기록했고, 그다음 달인 1987년 1월에는 12.0%를 기록하여, 정부는 사실상 패배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물가 외에도 브라질 경제는 외채에 큰 골머리를 앓게 되는데, 먼저 오일쇼크들로 인해 외채들이 많이 증가 했지만, 자국 산업화를 위해 오랫동안 수입 제품 대체 정책을 펼치고 있던 정부는, 물가를 멈추기 위해 가격동결을 하게 되자, 시장에서는 공급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조금씩 수입을 허가하고 있었지만 ‘수입’이 익숙하지 않았던 브라질의 외환고는 계속해 줄고 외채와 이자들을 늘고 있었다. 결국, 이를 대처하기 위해 1987년 3월 상호합의하에 외채의 이자 지급을 무기한 중단하는 외채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
모라토리엄이 국가에 가져다주는 가장 치명적으로 타격은 바로 국제금융사회와의 신용이다. 구체적으로는 외국 자본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이 그 시작이지만, 한번 잃어버린 신용을 회복하기에는 매우 어려웠었다. 또한, 당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지속가능성 성장동력이 필요한데, 이것을 내부적으로 창조하기에는 당시의 산업은 매우 취약했고, 무역도 폐쇄된 상황이라 엄청 도전적이었다. 지금와서 언론을 통해 밝혀진 이야기이지만, 당시 모라토리엄 선언에 대해 사르네이 대통령은 온전히 경제적인 결정이 아닌 정치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고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인 상황은 제헌국회를 의미한다. 1986년 11월 총선에서 당선된 상하원의원들은 1987년 2월 제헌국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새 헌법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고, 이때 하원의원들은 대통령제보단 내각제를 선호했었다. 특히 PMDB 내에 상원의원들이었던 FHC (페르난도 엔히께 까르도소, 1994~2002년 브라질 대통령), 마리오 꼬바스 (1995~2001년 상파울루 주지사) 등 진보적인 정치인들은 내각제를 선호했고 중도 또는 중도 보수층이였던 사르네이 대통령과 그 세력들은 대통령제를 유지하고자 하기 위해 정치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와 관련해 더 큰 문제를 가져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끄루자도의 패배 원인
브라질이 겪고 있었던 인플레이션 문제는 다른 국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록, 80년 전부터 오르고 있었던 인플레이션의 문제는 70년대 발생한 오일쇼크와 이 여파로 생겨난 중남미 국가들의 외채가 그 큰 원인이었지만, 브라질 경제는 농업이 기반이었고 수출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플레이션은 관성적이라 모든 이들은 매달 말일에 판매되는 상품의 가격을 조정하는 만큼, 급여 역시 일정 기간을 갖고 조정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방책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모든 사람의 급여 인상 중단은 실로 엄청 힘든 일이었고, 급여가 오르면 구매력이 올라 자연스럽게 물건들의 값이 비싸지니, 당시의 브라질 상황은 도미노와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브라질이 따라가고자 했던 이스라엘 수축경제 모델 같은 경우는 노조들과 합의로 가격동결을 포함해 임금동결까지 이루어냈었다.
그렇지만, 끄루자도의 패배의 큰 원인은 ‘가격동결’이라는 매우 강도가 높고 일시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약을 원했던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원래 3개월 수준으로 진행되어야 했던 가격동결의 효과가 즉각적이자, 정부는 이를 유지하는 방향을 잡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급여이다. 끄루자도는 물가가 누적으로 20% 달할 경우 임금을 올린다는 것이었는데, 당시의 인플레이 수준을 안다면, 20%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않는 것이 상식인데, 실제로는 12개월 걸렸었다. 결국, 이런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가격동결’ 외에는 다른 추가 정책을 취하지 않았었다. 여기서 재정과 통화와 관련된 정책들이 부재했던 것이고, 재정수지가 적자로 달하자, 추가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끄루자징유나 제2차 끄루자도를 발표했지만, 이마저도 내부적으로 제대로 된 회계조차 확보하지 못해 ‘도미노’의 현상은 계속되었고, 마지막으로는 달러다. 끄루자도는 달러에 대해 동결정책을 취했지만, 갑작스레 늘어난 수입에 대해선 대처하지 못한 채 외환 고를 줄어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외에도 구조이론에 근거하는 중남미 경제학자들은 조금 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지적한다. 브라질같이 농업에 기반한 나라는 물가와 경제성장이라는 양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성장을 위해 농업을 촉진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농업의 공급이 국제사회에 집중이 되어 고스란히 국내시장의 가격을 상승시킨다는 원리이다. 또 다른 원리는 빈부격차에 근거한다. 브라질같이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현실이 너무나도 달라 공급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기준은 빅맥 지수(이코노미스트 – The Big Mac Index)이다. 맥도널드의 빅맥은 전 세계 거의 일정하게 공급되는 햄버거 기본세트인데, 선진국들에선 대체로 비싼 가격으로 공급되고, 후진국에선 나름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이 되는 것이 상식인데, 여기에 한 가지 더해지는 점은 공급과 수요이다. 이런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취득하면 대략 국민들의 구매력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그 국가의 임금 수준으로 보면 비쌀 수가 있고 저렴할 수가 있다. 2022년 1월 기준으로 한국에서의 빅맥은 3.82달러인 반면 브라질에선 4.31달러이고, 한국에서의 임금 수준과 브라질의 임금 수준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브라질에서 어떤 이가 가격을 올리는지에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관성 인플레이션이 문제였을까? 끄루자도 정책을 비판했던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바람과 달리 실제 국민들이 과연 인플레이션 0%를 원했는지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한다. 이것은 관성적으로 정부가 내놓은 카드는 물가 연동 중단과 기준금리의 동결 화를 통해 국민들의 행동이 변화하길 기대했지만, 이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돈이 있었던 구매력이 풍부했던 국민들은 오버나이트 이자를 바라면서, 돈이 들어오면 은행에 입금하는 것을 반복하였었다.
마지막으로는 자국 무역정책도 문제였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수입 제품 대체 정책을 펼친 브라질로서는 자국 산업이 수요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라, 슈퍼마켓에는 물건이 Shortage (물건 부족) 사태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참고로 2차례 오일쇼크로 인해, 70~80년대 브라질은 수입품목 관리체제에 있어, 국민들은 세금을 내고 물건을 정식으로 가져오고 싶어도,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외채와 외환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당시의 예를 하나 들자면, 1986년 중반 Monza (몬자)의 1년 된 중고차의 가격은 실제로 판매되는 새 차보다 더 비쌌었다.
끄루자도를 축구 경기로 결과로 얘기하자면, 축구를 못하는 약소국이 강국 대상으로 후반전 15분까지 1-0으로 나름 선방하다가, 갑자기 한 골을 먹더니,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해 1-7로 대패하는 경기이다. (브라질 월드컵 – 브라질이 독일에 패배한 스코어. 이때부터, 참담한 패배는 무조건 1-7 스코어로 얘기한다). 1987년 모라토리엄으로 인해 푸나로 재무부 장관은 사임하고 후임으로는 FGV경제학 교수인 브레쎌이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브레쏄 정책 (Plano Bresser)」을 발표한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