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계 유고슬라비아 출신 기자인 블라드미르 헤르조그(Vladimir Herzog)은 4살 때 브라질로 이민을 온 이민자로 대학에선 철학을 전공했으며 Estado de São Paulo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언론 분야에서 나름 자리를 잡은 그는 런던BBC에서도 근무했으며, USP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지낸다. 그는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틈틈이 정치활동을 했었는데, 이때 브라질 공산당(PCB)에 연루되어있었다고 하여 군 정보국에게 체포가 되어 숟한 고문끝에 죽임을 당하게 되자 정부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었다. 유대인이었던 블라드미르는 유대교에 따라 자살을 한 사람은 ‘쉬바 (7일 추모)’와 ‘쉬로심 (30일 추모)’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장례위원회인 헤브라 카디샤에서 그의 장례를 진행하는데 이때 브라질에서 활동한 랍비 헨리 소벨은 블라드미르 몸에 고문 흔적이 있다고 지적하여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고 언론에 밝힌다.
물론 당시는 군정이고 언론은 엄격하게 통제가 되어 있어, 영향력은 그렇게 크진 않았다. 그렇지만, 1978년 소송을 통해 당시 판사인 마르시오 모라에스는 블라드미르의 죽음에 연방정부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여, 수사를 지시하였지만, 이행되지는 않았다. 다만, 70년대 말 브라질의 경제 상황은 매우 악화하고 있는 순간이라, 이를 인식한 가이젤 대통령은 남동부지역을 관할하던 군사령관을 해임함과 군의 정치활동은 순차적으로 줄여나가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설 수 있도록 초석을 다지겠다고 밝히곤 했었다.
군사 독재는 초반의 온건파 까쓰뗄로 브랑꼬를 거쳐 강경파 꼬스따 이 실바, 메디씨 대통령들이 있었다. 꼬스따 이 실바와 메디씨는 강경파 중에서도 매우 과격했으며, 블라드미르 사건은 메디씨에서 가이젤로 이임되는 상황에 발생한다. 가이젤 정권은 제1차 오일쇼크로 브라질 경제가 본격적으로 하향하는 순간들이며, 후임으로는 피게이레도가 대통령이 될 때는 이미 경제는 파탄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그렇게, 국민들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의회의 의석수와 정당의 변화
1974년도 총선거는 예외적으로 국민들이 시장과 의회 의원들 대상으로 투표를 할 수 있게 된다. 정부 여당의 예상과 반대로 국민의 지지를 힘입은 야당은 하원 의회에서 160석 (총 364석) 그리고 상원의회에선 16석 (총 22석)을 확보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가이젤 정부는 야당을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었다. 물론, 가이젤 대통령은 누차 민주정권 이양에 대해 “느리지만 순차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A abertura lenta, gradual e segura)” 진행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취임하자마자 맞은 총선거에서 엄청난 패배를 거두자 행동이 필요했었고, 이들이 취한 정책은 그다음 총선거에서 상원 의회는 2/3를 교체, 그리고 이 중에 1/3은 간접선거로 진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다만, 당시 군정은 악화하는 경제 상황으로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어갔고, 전국적으로도 많은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거기에 브라질은 IMF의 구제금융으로 서민경제가 파탄 수준으로 가게 되자, 반대 세력들은 ‘IMF 아웃’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반대운동을 펼쳤었다. 이때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피게이레도는 흐름에 맞춰 중요한 개혁안을 통과한다. 대표적으로는 정치인 사면령이다. 1979년 8월 28일 5표 차이로 아슬하게 통과된 이 법령은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정치범들을 사면한다는 법이었고 피게이레도 대통령은 대승적으로 재가를 한다. 또 다른 법안은 다당제의 도입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부의 여당인 Arena와 여당 겸 야당 역할을 하는 MDB가 있었는데, 다당제를 도입함으로, 사면령을 통해 정치권이 복구된 거물급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원하는 세력들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새 정당법으로 생겨난 정당들. 이들 정당은 1982년 총선거를 치르게 된다.
기존 정당 | 다당제 도입 후 변경 | 성향 | 내용 |
ARENA (정부 여당) | PDS (사회민주당) | – | 군 출신들과 옹호 세력들 |
MDB (야당) | PMDB (민주운동당) | 보수 * 중도 | 기존 MDB 세력들이 Ulysses Guimarães 중심으로 남음 |
PDT (민주노동당) | 진보 (노동) | Joao Goulart 전 대통령의 처남 Leonel Brizola 중심으로 창당. | |
PTB (브라질노동당) | 중도 * 진보 (노동) | Ivete Vargas. 바르가스 전 대통령의 여동생의 손녀. 바르가스 정치를 표방하여, PTB 부활. 참고로 브리졸라 역시, 바르가스계였음. | |
PT (노동당) | 진보 (노동) | 노조 활동을 하던 노동계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던 인사들이 Lula 중심으로 창당. |
1982년 총선에는 정부 여당은 235석으로 제1당의 자리를 유지했고, MDB에서 PMDB로 바뀐 200석을 확보했다. 물론, 이때는 인구의 증가를 감안하여 78년도에는 하원의원 의석수가 420석에서 82년도에는 479석으로 증가했다.
브라질의 직선제 운동: Diretas Já
전국적으로 민주주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이는 예술계도 그렇고, 언론계 또 사회 지식층 대다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나 블라드미르의 죽음을 비롯해 많은 민주주의 희생자들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며 79년 사면받은 좌우의 정치인들은 적극적으로 길거리에 나서기 시작했다. 1983년 떼오또니오 빌레라 상원의원은 Canal Livre와 인터뷰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밝혀 같은 해 3월 31일 헤시피 (뻬르남부꼬)에서 집회가 열린다. 그리고 집회들은 브라질 전국적으로, 고아이나, 꾸리지바, 상파울루 (빠까엠부 경기장)에서 지속된다. 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해,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를 통해 운동을 전개한다.
1983년 말에는 피게이레도 대통령은 군정의 마지막 대통령으로서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밝혔으며, 이를 믿지 않았던 야당은 계속해 직선제 운동을 진행해왔다. 그리고 1984년 1월 25일 상파울루에서 30만 명, 2월 24일 벨로 오리존찌에서 40만 명, 3월 21일 히우 데 자네이루에서 20만 명, 4월 10일 또다시 히우에서 100만 명, 마지막으로 4월 16일 상파울루 센뜨로인 쎄 성당에서 아냥가바우까지 150만 명에서 200만 명이 집결하여 직선제를 외쳤다.
그렇지만, 1984년 4월 25일 의회에서는 직선제 법안이 제출되었었는데, 피게이레도 대통령과 여당의 의도적인 방해로 법안 통과 최소 의원 숫자를 못 맞추어 법안은 부결되어, 기존의 룰대로 간접선거로 새 대통령을 뽑게 된다. 이때 야당은 연합하여, 미나스 주지사였던 딴끄레도 네베스가 대통령 후보로 그리고 여당에서 탈당한 그룹 층에 한 명인 사르네이 마라냥 (Maranhão)주 상원의원이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 군정의 기반이었던 정부 여당의 후보로는 상파울루 주지사를 지낸 빠울로 말루피가 나서게 된다.
딴끄레도의 비극적인 결말 그리고 정통성이 없는 새 대통령
총 686표에서 480표를 획득한 딴끄레도는 말루피를 꺾고 간접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 20년 만에 군정의 시대를 막을 내리며, 시민으로서 당선되는 그는 당시 74세로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미나스 주의원, 하원의원, 상원의원, 주지사를 거쳤고, 바르가스 정부 법무부 장관, 혼란스러웠던 조엉 굴라트 정권때 유일무이한 국무총리도 지냈다. 특히, 그는 군정 때 망명을 가지 않은 정치인으로 야당이었지만 군과 잘 화합하는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렇지만, 비극적이게도 딴끄레도는 당선된 지 2개월도 안 돼 갖고 있던 병세가 악화하여 취임도 못 한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토록 바랬던 대통령궁의 경사로를 브라질 국기로 감긴 관속에서 올라가게 된다. 당시는 엄연히 군정이었고 딴끄레도는 비록 간선제로 당선이 되었더라도, 피게이레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국가 행정명령(Ato Institucional)들로 연장을 할 수 있다고 공연히 말을 해왔고, 이미 증세가 있었던 그는 당장의 수술을 거절하며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에 취임해야 정권 이양이 되는 것이라고 밝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았었다. 이는, 만약에 그가 병상에 누운 상태로 부통령인 사르네이가 취임식에 올라가게 된다면, 군 출신들은 이에 정통성이 없다고 하며 거절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피게이레도 대통령은 정권 이양은 약속대로 이행했지만, 딴끄레도가 단상에 올라오지 못하자 부통령으로 자리에 오른 사르네이에게 대통령의 어깨띠를 이전하는데 거절했다.
사르네이는 엄연히 말하면 정부·여당 출신이다. 그는 JK의 PSD당에 있다가 보수당인 UDN에서 마라녕 주지사로 당선이 되었다. 다만, UDN가 해산되자 야당 정치인들은 MDB로 간 것과 다르게 그는 군정의 정당인 ARENA에 입당하여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딴끄레도의 러닝메이트가 되기 전에는 ARENA 정치인들이 만든 PDS에 몸을 담은 뒤에 PMDB (민주운동당)에 입당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군 출신들은 그를 배신자로 그리고 PMDB 사실상 리더였던 울리쎄스 기마라엥스 (Ulysses Guimaraes)도 그를 탐탁게 보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정통성이 없는 대통령이 연평균 1.7% 경제성장, 1,021억 달러의 외채, 223%의 물가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브라질 경제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있어, 앞으로 날들은 매우 어두웠었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