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브라질에서의 군사 독재는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년이 조금 넘는 기간 지속되었지만, 1인 독재체제가 아닌 군의 집단체제로 이들은 군인들로만 구성된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원래 군은 64년 쿠데타를 이후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구축하고 경제 발전을 위한 성장 기반을 구성한 뒤에 권력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실제로 온건파들은 곧 군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반복했었다. 이들은 슬로건으로 “안정적으로 개발 (Desenvolvimento com segurança)” 외치며, 육군, 해군, 공군 장관들로 구성된 최고 혁명위원회을 통해 첫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한다.
군인들은 정치인들에게 곧 정권을 이양할 것이니 새 대통령을 선출하여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는 데 협조를 요청하였고,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JK 전 대통령, 바르가스와 장고의 극 반대파였던 Lacerda 과나바라 주지사들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은 이에 호응하여 육군참모총장이자 온건파였던 까스뗄로 브랑꼬 (Castello Branco) 장군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 까스뗄로 브랑꼬 정부는 공연히 임시정부라고 하며 1966년까지 정국을 수습하여 정권 이양 계획을 발표하였지만,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군 세력의 지지를 받던 후보들이 패배하자, 이들은 정당들의 해산 명령하였고, 1967년에는 새 헌법을 제정한다.
브라질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Ato Institucional (AI)
AI는 일종의 국가보안법으로 헌법의 상위개념으로 최고 혁명 위가 설치한다. 직역하면 ‘행정 역할’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단순한 역할 수준을 넘어 정치인들의 권한을 박탈함과 일반 시민들의 권리까지 침해하기 때문에, 많은 언론은 국가보안법으로 설명한다.
항목 | 공포일 | 주요 내용 |
AI-1 | 1964.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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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2 | 1965.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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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3 | 1966.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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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4 | 1966.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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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5 | 1968.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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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 Institucional (AI)는 총 12번 공포되지만, 다섯 번째로 공포된 AI-5은 정치인 외에도 일반 시민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되고, 특히 문화와 언론 인사들의 권리까지 침해했기 때문에, 지금도 누군가 인터뷰에서 AI-5에 대한 옹호 발언을 할 경우,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는것을 넘어 정치인일 경우 징계 사유가 된다.
까스뗄로 정부의 경제개발 수장, Roberto Campos (호베르또 깜뽀스)
군사정권을 경제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와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나는 1973년부터 독재 정권의 종료시기인 1986년까지로 나눠 보는 것이 역사적인 흐름으로 가장 올바르다. 전반기에는 온건파 까스뗄로 브랑꼬, 강경파 꼬스따 실바와 메디씨 그리고 하반기에는 가이젤과 조엉 피게레도 군 출신의 대통령들이 있었다.
까스뗄로 대통령은 외교관 출신으로 조지워싱턴 경제학을 졸업한 호베르또 깜뽀스를 기획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지금도 많은 자유주의 경제인으로부터 존경받는 깜뽀스 장관은 외무부에 들어와 워싱턴 대사관에서 상무관을 지낸뒤에 유엔 브라질대표부에서 경제를 담당했고, 바르가스의 경제보좌관으로 BNDE (경제개발 은행 – 현재 BNDES로 브라질의 사회와 경제 발전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은행이다)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1958년 동 은행의 총재로 취임하여 JK 정부의 Plano de Metas (국가개발계획)에 적극적인 참여를 했다. 이후에는 자니오와 장고 정부에는 브라질 미국대사로 경제원조와 부채협상을 담당했었다.
깜뽀스와 함께 금융 정책의 수장으로 취임하는 재무부 장관은 옥따비오 불료엥스 (Otávio Bulhões)이다. 불료엥스는 중앙은행의 전신인 Sumoc의 국장으로 1926년부터 재무부에 입부하여 오랫동안 재무부의 일을 했던 베테랑이다. 이들 둘은 현 73%의 인플레와 전년도 마이너스 성장 (2.2%)의 엄중한 상황에서 경제 정책을 맡게 된다.
PAEG (정부 경제실행계획 – Plano Ação Econômica do Governo)
까스뗄로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 만에 발표된 PAEG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침체한 경기 회복 및 투자환경을 해결해야 하는 중대하고 야심적인 목적을 갖고 시작한다. 깜뽀스 장관은 PAEG의 주요 철학은 시장과 정부가 핵심 역할을 번갈아 가며 경제 방향의 중심을 잡아, 무역과 외국 투자를 활발하게 하며, 현실경제에 기반해 환율, 조세, 통화의 안정성 구축과 국가의 생산성 확대를 통하여 효율적인 소득분배로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높은 인플레이션은 지금 상황과 매우 다른데, 종합적으로 그 원인은 정부의 예산의 적자, 금융시장의 대출 확대 그리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높아지는 임금들이 주원인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당시 정부는 외채로 인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약 38억 달러에 달하는 총외채의 48%은 그다음 해까지 지급해야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매우 우호적으로 브라질을 측면에서 지원했고, 외채 상환기간을 5년에 늘림과 동시에 유예기간까지 2년을 추가해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추후 추가 협상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IMF와 USAID (미국국제개발처)를 통해 총 1억 7500만 불의 차관도 들여와 PAEG의 집행을 위해 속도를 높였다.
PAEG의 정책들은 단기적으로는 정책의 안정성을 통해 투자 우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며, 금융 개혁을 중심으로 임금과 노동환경, 산업 그리고 농업 개혁정책들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것이다.
PAEG의 개혁의 핵심 내용
금융 정책의 주목적은 정부 재정수지 흑자였다. 당시 정부 재정수지는 12년째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아래는 대표적으로 금융과 관련된 정책들로 1964년부터 1967년까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많은 개혁안이 진행되었다. 많은 전문가는 이때 브라질이 처음으로 금융과 관련해 근본적인 개혁을 진행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를 한다.
정책 | 주요 내용 |
중앙은행 (Banco Central do Brasil – BCB)의 공식 창설 | 브레튼 우즈(1945)에서 합의한 대로 브라질은 Sumoc을 Banco do Brasil 산하에 만들어 중앙은행 기능을 만들었는데, 까스뗄로 정부는 Banco do Brasil에서 그 기능을 떼어 20년만에 중앙은행을 창설함으로 국가의 금융과 통화 체제를 일부 독립적인 방식으로 한다. |
Conselho Monetário Nacional (국가통화위원회) 창설 | 중앙은행 산하 브라질 금융시스템의 최고기구로 인플레이션 목표 설정과 통화 정책을 수립 및 결정 한다. CMN은 중앙은행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위원회다. |
ORTNs (Obrigações Reajustáveis do Tesouro Nacional) | 정부 채권의 물가에 연동함으로 투자 확대. 이전까지는 정부의 채권은 물가 상승을 반영하지 않았기에, 투자가 소수에 제한되어있었음. 정부는 1966년 조세법을 제정하면서, 투자시장을 더 활발하게 개혁하였음. |
Banco do Brasil의 대출 규제 | Banco do Brasil은 국영은행으로 대출의 35%를 책임지고 있었다. 국영은행 대출을 규제함으로 정부의 지출을 감소했다. |
은행개혁법 통과 | 정부는 대출과 관련해서 차입자의 상환금이 물가 연동되어 조정되면 고인플레이션인 현상에선 부담이 너무 크다고 판단해, 물가 비 연동 대출을 고민했었다. 이에 따라 은행 개혁법을 통과시킴으로, 은행들이 금융상품을 만드는데 조금 더 자유를 부여했고, 이와 함께 자본시장 형성을 조성했다. 특히 투자은행들의 창설이 가능해짐으로, 단순히 대출 기반으로 시장 활성화가 아닌 투자 기반으로 시장 활성화를 노렸다. |
영업이익 본국 송금법 개정 | 장고 정부 때 통과된 법안으로, 외국 기업들의 영업이익의 본국 송금법을 개정함으로, 외국기업들의 브라질 내 투자와 이익환수를 원활하게 만들었다. |
노동과 고용
노동과 고용에 대해선 지속되는 고인플레이션으로 임금을 동결하는 정책과 쉬운 고용과 해고 정책을 펼쳤다. 노동조합들은 정부의 강력한 그립에 관리와 통제를 받기 시작했지만, 지속해서 낮아지고 있던 브라질의 생산성에 대해선 개혁이 진행되지 않았다.
정책 | 주요 내용 |
임금 조정 |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임금이 계속 높아지면 기업들의 생산성이 계속 저하되리라 판단한 정부는 임금은 물가보다 더 낮게 조정되기 위해 2년의 평균치를 잡아, 조정하였다. 이로써, 단기간으로 임금 조정을 막고, 물가를 안정화함으로 생산성을 유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
FGTS 창설 | FGTS는 근무 기간 보장기금으로 고용주와 노동자가 급여에 일부를 떼어 기금에 입금하여, 주택을 구매하는 데 사용이 될 수 있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FGTS를 만든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지만, 이때 당시에는 고용과 관련해 더 황당한 규제가 있었다. 노동자가 10년을 일하면, 고용주는 정당한 사유 (Justa Causa) 없이 해고할 수 없었고, 그 전에 해고가 될 경우, 근무를 한 연도 숫자에 따라 급여를 지급해야 했다 (2년 근무 시 2개월 치 봉급을 퇴직금으로 지급). 따라서, 노동 시장은 유연성이 부족했고 고용과 해고는 생산성 기준이 아녔다. FGTS를 만듦으로, 고용주 입장에선 해고가 쉬워졌고, 노동자는 기존에 비해선 더 적게 받게 되었지만, 반대로 정부는 이 기금을 주택 구매에 충당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건설업에 붐을 일으켰다. |
산업과 농업
산업과 농업과 관련해서는 정부의 경제 철학에 맞게, 작은 정부를 통해 시장 우선주의이지만 이 전에 존재했던 시대와 맞지 않는 법안들의 전면 개정과 필요한 분야들에 정부의 개입을 우선시하였다. 다만, 정부의 방향과 맞지 않게 여러 국영기업이 창설되는데, 이에 대해 개발정책을 주도했던 깜뽀스 기획부 장관은 훗날 인터뷰를 통해 전기, 전화, 수도와 관련한 국영 기업은 만든 것은 당시 시대적인 요구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의 정부가 개혁할 타이밍을 놓쳐 오랫동안 국영기업으로 유지되는 원치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정책 | 주요 내용 |
정부 지원 주택 사업 | 정부는 1964년 8월에 주택금융시스템(SFH)과 국가주택은행 (BNH)을 만들어 정부 지원 주택 파이낸싱 (대출) 사업을 시작했으며, 저축통장과 부동산채권도 만들었다. 특히, FGTS에서 모금되는 기금은 66년부터 주택 금융시스템(SFH)에 사용됨으로, 사기업에서 근무 후 집을 장만할 수 있게 제도적 정비를 했다. |
자원 | 까스뗄로 정부는 장고 정부에서 제한했던 외국기업의 광산개발 허가하였고, 연방정부와 분쟁으로 최고법원까지 갔던 미국의 Hanna Mining의 분쟁도 해결하였다. 이외에도 1934년 제정 이후 단 한 번도 개정이 되지 않았던 광산 법도 시대와 맞게 개정하였다.
그리고 석유와 관련해서도 불료엥스와 깜뽀스는 석유화학 사업에도 민간투자를 허용케 했고, 브라질전기공사 (Eletrobrás)을 통해 미국의 Amforp 전기회사의 브라질 내 자회사들을 인수하였다. |
농업 | 토지와 관련해서도 개혁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64년 11월 30일 토지이용규제 기본법을 만든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에게 극심한 반대를 받은 이 토지개정법은 1850년 브라질 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토지 기본법을 개정한 것이었다. 당시 브라질 토지 기본법은 왕의 허가 아래 토지를 거래할 수 있었는데,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헌법이 보장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인이 있는 토지에 대해선 정부가 그 어떠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는 국채를 통해 토지 주인에게 배상함으로 토지를 실제 주인에게 분양할 수 있게 되었다.
깜뽀스 장관은 토지의 규격을 새로 정하는 안을 냈었고, 세금 체계도 그 크기에 따라 지급하게 된다. |
2부에서 계속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