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주셀리노 쿠비세크(JK)는 의회와 행정부를 두루 거친 의사 출신의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군의관 생활을 하던 주셀리노는 자연스럽게 미나스 지역의 군인들 그리고 정치인들과 가까워졌고, 1933년에는 미나스 주지사로 임명된 Valadares으로부터 주지사 비서실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40년에는 벨로 오리존찌 시장으로 임명된다.
시장으로써 행정 무대에 데뷔한 그를 언론에서는 Prefeito Furacão (돌풍적인 시장)이라고 불렀다. 이 이유가 그의 행정 스타일에서 나오는데, 당시 벨로 오리존찌는 약 20만명의 인구가 있는 미나스 주의 수도였지만, 여러 가지의 재정문제로 아주 어려운 상태였다. 이때, JK는 적극적인 정부 주도 개발 사업으로 도로, 수도, 전선 공사들을 진행했고, 지금도 관광지로 매우 유명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Conjunto Arquitetônico da Pampulha (팜풀랴 모던 앙상블)를 브라질의 건축 전설인 Oscar Niemeyer에게 설계를 맡겨 지었다. 시장직을 마친 뒤 한 차례 하원의원 임기를 거쳐, 미나스 주지사로 당선되었는데, 그의 스타일을 유지하여 당시 미나스 주 전역에 전기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CEMIG (미나스 전기공사)를 만들었고, 5개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전기 공급을 3배로 늘렸다.
국가개발계획 “50년을 5년에 (Cinquenta anos em cinco)”
당시 정치 상황은 군 내부 세력들과 UDN의 쿠데타 모의, JK의 안전한 대통령직 취임을 위한 Lott 장군의 역쿠데타로 불안정했었다. 따라서, JK는 온전한 국민의 지지가 없다면, 임기 내내 군과 정적들에게 위협을 당할 것이라 판단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발표한 계획이 바로 그 유명한 Plano de Metas라는 국가개발계획이다.
1956년 2월 1일 첫 내각 회의에서 모든 장관과, 군 수뇌부, 브라질 은행(중앙은행 역할) 총재를 포함한 대통령 직속 개발자문회의 를 만들어 개발계획 추진 콘트롤 타워를 만들었고, 간사로는 BNDE (경제개발 은행) 총재를 선임했다. 그리고 나온 슬로건이 “50년을 5년에”이다. 매우 야심 찬 이 계획은 5년 안에 총 31개의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공포하였고, 목표들은 총 5가지로 에너지, 교통, 식량, 산업, 교육으로 나눠었다.
국가개발계획의 최종 목적은 국가 기반의 선진화를 통한 경제 성장이었다. 특히, 이때 당시 브라질이 겪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계획되지 않은 완제품 수입’인데, 1930년부터 정부 기조는 산업화를 통한 완제품 수입대체였다. 완제품을 수입하면 너무 많은 양의 외화가 빠지게 되고, 수지결산도 맞지 않아 정부 입장으로선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이유가 막대한 설비 투자가 첫 번째이며 두 번째로는 유지보수를 할 수 있는 인력 부족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획은 5가지 분야들이 서로 융합할 수 있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들이 추진 되었다. 대표적으로 예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장의 선진화를 위하여 트랙터를 국내에서 생산들이 추진 되었다.
JK임기내에 해외에서 들어온 직접투자는 9억7900만불였는데, 대다수가 설비 투자들이었고, 수입세는 전면으로 면제되었다. 특히, 이렇게 유입된 자금은 국내 금융시장을 활발하게 했고, 사업가들에게도 적극적인 대출이 가능해졌다.
브라질리아 건설
국가개발계획이 31개인 이유는, 31번째 목표가 가장 중요한 목표인 브라질리아 건설이었기 때문이다. 브라질리아 건설은 이미 헌법으로부터 예정되어있던 일이다. 첫 헌법인 1891년에 국가의 수도는 지역적으로 중앙에 설치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었고, 이 조항은 1934년 그리고 1946년 개헌에서도 유지가 된다. 브라질리아 건설은 Lucio Costa와 Oscar Niemeyer 지도아래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총 3천명의 인부와 200대의 건설기계들이 투입되어 41개월 만에 건설이 되었다. 특히 건설 종료일은 미나스인인 JK의 강한 요구를 받아들여 1960년 4월 21일, Incofidência Mineira (찌라덴찌스의 날)을 맞춰 밤낮을 지새우며 건설하였다.
헌법를 따라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기에 브라질리아 건설에 대해선 이의제기가 없었고 또 국가개발계획의 한 축이었던 지역발전을 통해, 광활한 브라질의 땅의 연결한다는 목표도 매우 그럴싸하였다. 그렇지만 그 큰 비용을 어떻게 충당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1959년에서 1960년 브라질리아 건설과 관련해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미 많은 양의 화폐를 발행했기 때문에 다른 대책이 필요했었다.
이때 생긴 방안이 IMF로부터 금융지원을 받는 것이고, 대략 3억달러 수준의 자금을 유입할 예정이었다. 다만, IMF는 브라질에 금융지원을 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개선책을 요청했고, 이 중에서 조세개혁, 임금동결, 정부의 과도한 지출 제한, 연 물 가율을 6% 수준으로 유지를 요구했었다. JK는 IMF요구가 과도하다고 여겼고, 당시의 재무부 장관 교체와 IMF와의 협정을 파기한다고 선언했고, 이는 국민들에게 환영 받았다.
JK 경제팀이 선택한 방법은 고전적인 국채발행을 하였고, 비용 역시 시장가보다 더 낮게 내놓아 겨우겨우 브라질리아 건설을 마치게 된다. 브라질리아 건설은 약 15억달러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당시 브라질의 총생산이 150억달러인 것을 고려한다면, 국가 총생산의 10%가 수도건설에 투입이 된 것이다.
5부에서 계속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