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세계 2차 대전 동안 브라질은 전쟁 참가국들 대상으로 다양한 원자재를 공급함으로 수출이 많이 늘어났었고, 동시에 1930년대부터 지속한 완제품 수입 금지 때문에, 꽤 규모가 있는 수준의 외환 고를 보유하게 된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계속된 공급난으로 두뜨라 정부는 일부 품목들에 대한 경제 개방을 선택하게 된다.
예상치 못했던 공급량 때문에 경제엔 인플레이션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를 제어하기 위해 정부가 취한 정책은 고환율 정책으로, 수입 제품들 간의 경쟁으로 공급을 조정하겠다는 방안이었다. 경제 이야기 바르가스 마지막 편을 본 사람들은 잘 알지만, 정부의 의도적인 개입으로 환율을 통제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이때는 이미 암 환율 시장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가 이 모든 것에 대해 관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었다.
두뜨라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1947년 브라질의 달러 피해액은 3억 달러에 달해, 외환 고가 3,300만 달러로 줄어들게 된다. 나름대로 전쟁의 혜택을 받아, 튼튼한 외환 고를 만들었던 정부의 재정이, 무계획을 통한 수입 개방으로, 자국의 달러가 쉴 틈 없이 빠져나가게 되는 암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 같은 해 6월 정부는 수입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1949년이 돼서야 브라질 통화의 내림세가 멈추어 1949년 통화 수지가 흑자로 전환하게 된다. 이렇게 두 뜨라는 대외적으로 큰 두각을 내지도 못한 채, 처참한 경제 성적과 큰 특징 없이 임기를 마친다.
두뜨라 정부 당시 외화로 거래된 수입 및 지출: 1946년부터 적자가 나오기 시작하며, 1947년 최고점을 찍게 된다. 1949년이돼서야 흑자 (달러 유출 최소화)가 되어, 1950년부터 정상화가 된다.
바르가스의 복귀
일전에 선거권을 잃지 않은 채 뽀르또 알레그리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머물렀던 바르가스는 일찌감치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의회에서 독재자였던 자신의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서, 자신의 업적을 부각하는 연설을 많이 했었고, 여론몰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실제로 언론은 그를 Pai dos Trabalhadores (노동자들의 아버지) 또는 Pai dos Pobres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바르가스는 주요 공약으로 노동법의 확대와 강한 산업화라는 상반된 방향을 가진 정책을 갖고 나와, 당선되기 전부터 이미 혼란이 예상되었던 정부였다.
어쨋든, 선거는 치러졌고, 바르가스는 UDN (보수), PSD (당시 여당)에 과반이 안되는 표차로 이기게 된다. 당시에는 결선 투표가 없었던 점도 주목해야 할만한 점이다.
바르가스 2기 정부에 특징을 몇 가지 더 소개한다면, 먼저 그 역시도 민주적인 절차로 당선된 정치인으로, 의회와 협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UDN는 바르가스의 독재를 끝낸 정당 중 하나로, 보수적인 색채를 갖고 있어, 노동자를 기반을 두던 바르가스와는 물과 기름인 사이였다.
결국 바르가스는 UDN와 협력을 할 수 없게 되자, 제4 정당이었던 PSP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자신이 독재정권을 할 때 한 뿌리였던 당시 여당이자 제1 정당인 PSD의 일부와 협력을 맺어 정부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물론 지금과 비교를 한다면, 3~4개의 정당이 반수 이상을 보유하기 때문에, 고도의 합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의 독재로 반신반의한 눈초리를 받던 바르가스에겐 어마한 정치력이 요구되는 정치 환경으로, 매우 도전적이었다.
최저임금 100% 인상
1943년부터 두뜨라 임기 말까지의 최저임금은 동결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바르가스가 당선되자,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을 기대했는데, 인상률은 매우 낮아 불만은 최고조로 가고 있었고, 1953년에는 갈등이 극심화되어 30만 명의 노동자들이 상파울루 거리로 나가 시위를 펼쳤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바르가스는 노조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Joao Goulat (일명 Jango, 1961~1964년 브라질 대통령)을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해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 또한 마저 적극적인 야당 역할을 하고 있던 UDN당으로 인해 큰 난관에 맞이하게 된다.
특히, UDN는 Jango내세운 100%의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안에 대해 재계와 야당은 결사항전을 펼치게 되어, 바르가스는 최저임금은 그대로 밀어붙이는 대신 Jango 해임을 하겠다고 하며, 군 내부에서도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반 노동자들과 군인들의 임금격차가 적어지는 것을 걱정해, 전쟁부 장관에는 반공산주의 군인을 임명함으로 위기를 해결해나갔다.
이토록 정치는 매우 혼란했고, 그나마 경제 정책으로 내세운 것은 국영기업들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이미 1기 정부 때 여러 국영기업을 창설하여 국가주도 경제 개발을 펼쳤는데, 1952년에는 BNDE (사회개발은행)을 창설해 국가 발전에 관한 프로젝트를 파이낸싱(대출)을 하였고, 1953년에는 Petrobras를 만들게 된다.
Petrobras의 창업
일전에 바르가스는 헌법으로 브라질 땅에서의 자원 개발은 국가주도만이 가능하다고 못을 박았었는데, 1945년부터 재계와 의회는 국가주의 심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당시 대통령이던 두뜨라는 석유 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결과는 매우 지지부진했었다. 1951년 다시 대통령이 된 바르가스가 맞이한 상황은 국가주도 개발을 희망했지만, 자원과 기술 부족으로 선뜻 나서지 못했고, 민자개발 여론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1951년 12월 바르가스는 Petróleo Brasileiro S.A 일명 Petrobras를 창업 계획서를 의회에 제출했고, 기업 구조를 처음부터 100% 국영기업이 아닌, 국가는 대주주 역할을 함과 동시에 10분의 1의 주는 외국인 투자를 허용케 했다. 의회 내에서 몇 차례 강한 반대를 붙였고, UDN와 같은 야당은 “O petróleo é nosso (석유는 우리의 것이다)”라는 캠페인을 내세웠지만, 1953년 6월, 이미 존재하던 외국인 소유 정제 소를 유지한 채, 다국적 기업과 사기업에도 석유 유통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을 포함해, Petrobras가 탄생하게 된다.
국가주도 중심에 민자 참여도 허용케 한 Petrobras는 대주주가 연방정부로, 석유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되, 유통과 관련해서는 사기업의 참여를 허용케 하였고, 이를 감시하는 역할을 CNP (국가석유자문위원회)에게 맡겼다. 바르가스는 대정부 메시지로 “오로지 국가의 자본, 기술, 그리고 노동으로 Petrobras는 브라질의 경제독립에 대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라고 남겼다.
3부에서 계속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