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브라질의 모습은 매우 희망찬 모습이었다고 한다. 정권의 주체가 바뀌었지만, 경제는 커피로 인해 무척 활발했고, 노예제도도 전적으로 폐지되어 앞으로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라고 보였다.
커피 남작들은 군 엘리트들과의 혁명으로 공화국을 세웠는데, 임시정부 수장으로 새 헌법을 준비하기 위해선 장성출신이자 합리적인 성품을 가진 데오도로 다 폰세카가 선택하게 된다. 그가 선택된 이유는 왕정 파에게도 큰 거부감이 없는 인물이라 판단이 되어 새 헌법을 준비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수장으로 적임자라고 했다.
매우 가난한 사회 그리고 양극화
제일 먼저 꼭 알아야 하는 점은 왜 브라질 사회가 양극화되어있는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노예제도에 있다. 당시 노예제도가 폐지 되자, 일부 지식인들은 노예들의 자녀들에게 적극적인 교육과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 동화정책이 필요 했다고 했지만, 이는 철저히 외면되었다.
결국에는 국민의 다수에 대한 정책이 부재함으로, 교육이 발전을 한다고 해도, 이는 엘리트와 얼마 안되는 이민자들에게만 갈 수있는 혜택이었고, 이 모든 것은 브라질 노동자의 생산력에 연결되어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양극화 시작은 이때부터,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정책 부재와 특히 갑작스레 사회 구성원이 되어버린 노예들에 대한 방치가 그 근본적인 원인 중에 하나라고 보면 된다.
1890년에는 국민의 34%가 흑인과 혼혈인 그리고 교육과 관련해서 문맹률이 88%이었으니, 전문가들은 이때의 브라질을 매우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다수인 단일문화에 농장주들의 중심인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첫 개혁 정책을 주도한 후이 바르보사와 경제 위기
후이 바르보사는 법률가이자, 노예제도의 폐지를 줄곧 외쳐온 공화파 정치인이다. 40세의 나이로 데오도로 정부의 첫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 되었는데, 당시까지 정부가 매우 보수적으로 경제정책을 운용 했다면, 바르보사는 적극적인 대출과 화폐 발행 그리고 산업화를 위한 사업 지원을 통해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기관들의 역할 정립과 같은 기초적인 틀을 잡는 데 주력을 했다는 점은 긍정적이었지만, 무리하게 시중 은행들도 화폐를 발행 할 수 있게 허가한 점이 바로 브라질의 첫 경제 위기인 Crise de Encilhamento (말이 달리기를 시작하다가, 갑작스럽게 넘어지는)을 맞게 된다.
새 정권이 시작한 지 불과 3년만인 1892년 브라질은 극심한 경제 위기를 맞게 되어 경제 성장은 마이너스로 돌아갔고, 돈도 시중에서 빠른 속도로 줄기 시작하자, 정부는 신뢰를 잃어 약속하였던 사회 개혁 정책은 물 건너갔고, 또한 초대 대통령이었던 데오도로는 1년 전 새로운 헌법 제정으로 브라질 행정부의 권력 축소와 연방국가의 토대가 되는 주 단위의 행정부와 입법부 설립을 반발해 의회 폐쇄와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지만, 군의 반발로 결국 하야 하게 된다.
대체 노동력, 이민자와 커피 남작들의 정계 진출
데오도로가 하야하고, 1894년 선거를 통해 쁘루덴찌 모라이스가 대통령의 당선이 되었고 1898년에는 깜뽀스 살레스 대통령의 당선이 되어, 브라질은 본격적으로 커피 남작들의 절대적인 지배하의 일명 Café com Leite 정권이 시작된다.
까페 꽁 레이찌는 간단하게, 상파울루주 생산품목인 커피 그리고 미나스의 생산품목인 우유에서 유래된 것으로, 당시 양쪽 주(州)는 브라질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었다. 상파울루는 PRP (파울리스타 공화당) 그리고 미나스는 PRM (미네이로 공화당)으로 대표가 되어, 각 대통령 임기마다 서로 번갈아 정권을 잡는 형식의 정부였고, 그 시작을 상파울루 출신 깜뽀스 살레스가 하게 된다.
그렇게, 브라질 정부의 집중은 커피만을 위한 정권이 된다. 여기서 제일 유명한 정책이 바로 대체 노동자였는데, 당시의 커피 생산력이 기존의 인력으로 매우 더뎌지자 결정한 것이 유럽에서의 이민자 유입이었다. 그리고 이 유입정책을 위해서 정부의 막대한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민자들을 노동자로 고용하는 커피 농장들엔 대출과 이민자의 정착지원금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브라질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고정 봉급이 아닌 생산력을 기반으로 돈을 받게 된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진 커피나무에서 생산되어 판매된 금액을 받는 일부의 소규모 주주형식이였다는 것이다.
상파울루는 중남미 명실상 경제수도로 자리잡음.
1889년에서 1928년까지 커피 농장에서 일을 하기 온 이민자의 숫자는 약 350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커피 농장들이 가장 많았던 상파울루로 오게 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가족들과 이민을 오는 게 아니라, 물물 교환을 위해 쓸만한 물건 그리고 소액의 돈을 갖고 이민을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커피 농장을 통해 번 돈으로 땅을 살 수 있었고, 일부는 자신들만의 농장을 또 만들기도 하였고, 또 일부는 시내에 상점을 오픈을 하는 수완을 펼쳤다.
(2부에서 계속 됩니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