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브라질은 다양한 상품들을 수출하며 항상 세계 무역 중심에 있었다. 처음에는 빠우 브라지우, 세기별로 설탕, 금 그리고 19세기에서 지금까지는 커피까지이다.. 그렇지만,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는 무역을 통해 벌어드린 돈은 고스란히 지배 국가로 돌아갔고, 브라질의 개발은 그들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1822년 브라질 제국이 창업되었고, 다시 경제 호황을 맞게 된 브라질은 그렇게 얻은 막대한 부를 어디에 썼을까?
당시의 시대 오피니언 리더들은 커피 남작 (Barão de Café)들이었고, 그들과 제국의 내각이 조금만 더 미래를 내다봤다면, 커피의 시대 역시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수요가 줄어들게 되며, 한 상품을 기반한 경제는 기본 틀 자체가 안전하지 않아, 쉽게 위기로 이어지는 게 상식인데, 이들은 이런 것들을 무시한 채 당장의 오늘날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부는 영원하지 않으며, 자본이 쌓여있을 때 미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동시대의 미국은 이민자들의 유입과 농업 혁명을 이루어냈고, 교육은 1770년 토머스 제퍼슨이 주장 한 대로 국가의 토대를 위해 기반이 잡혀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신문과 성경을 읽을 정도로 수준이 매우 발달했다. 이에 반면, 브라질은 영원할 것 같던 노예무역과 커피의 이익에 취해, 제대로 된 발전을 못 했다.
적극적인 인프라 투자 그리고 늘어나는 외채
19세기 중반 브라질 경제는 커피의 생산과 운반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프라 투자를 했었는데, 제한된 비전과 예산을 갖고 있던 브라질 제국은 영국으로부터 막대한 대출을 통해 여러 철도를 건설했었다. 1884년에만 해도 건설된 철도의 길이가 6114km이었고 이외에도 1,650km의 철도가 건설 중이었다. 이 모두가, 국민들의 교통편의보다는 커피 농장들의 수출을 돕기 위한 철도들이었으니, 21세기 오늘날 수출들이 철도의 존재조차 볼 수 없는걸 고려하면, 매우 아이러니 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외채이다. 독립자금으로 영국으로 받은 외채의 규모는 줄어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파라과이 전쟁이 다가오자, 500만 파운드였던 규모가 두 배로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철도 사업으로 외채는 제국 말기 이미 3000만 파운드 수준으로, 자금의 추가 유입도 있었지만, 기존 대출을 갚기 위한 또 다른 대출인 Founding Loan의 수준도 매우 늘어났다.
브라질에서 왜 이렇게 기준 금리가 높냐고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그것은 결코 하루 이틀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국 때부터 시작된 외채가 가진 있는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된다.
몰락의 시작. 파라과이와의 전쟁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막대한 비용이 지출된다. 파라과이와의 트러블은 먼저 우루과이 내정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여기서도 경제적인 배경이 있다. 당시 산토스와 히우 데 자네이루 중심으로 상품들이 내륙으로 운반되기 위해선 해안가를 통해 파라나강과 우루과이강들이 이용되었는데, 이런 브라질 입장에서 우루과이의 주도권을 잃게 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따라서, 1863년 브라질은 우루과이에서의 야당인 꼴로라도 지도자 Venâncio Flores를 지원해, 당시의 집권당인 블라꼬 당을 몰아낸 것이었다. 이것은 파라과이의 지도자였던 Solano López에겐 위기로 다가왔는데, 이 이유는 역시 경제적인 배경으로 파라과이가 유일하게 바다로 나갈 방법은 우루과이를 통해서였다. 결국, 브라질과 껄끄러웠던 파라과이 입장에선 주도권을 뺏기게 되니, 배수진을 치며 선제공격을 가하게 된다.
파라과이는 브라질의 마또 그로소와 히오 그란지 두 술 지역에 공격을 가했으며, 아르헨티나엔 군대를 이동 할 수 있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해당 지역도 공격을 가했다. 결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3개국이 Tríplice Aliança을 구성해 6년간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으며, 총 44만 명의 사상자, 그중에서도 파라과이 측에만 30만 명이라는 사상자를 낼 정도로 매우 잔혹했었다.
브라질은 이 전쟁을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고, 동 빼드로 2세는 자신의 사위를 직접 보내 Solano를 끝까지 추격하라고 명하였다. 여기서 관찰을 해야 할 점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아메리카 대륙의 유일한 제국이자 황제라는 타이틀을 가진 동 빼드로 2세 입장에선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라, 제대로 이 대륙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두 번째는 영국으로부터 또 다른 대출이다. 전쟁의 비용을 대기 위해선 브라질 정부는 로스차일드 은행으로부터 4백만 파운드, 당시 외채의 3/1 수준의 규모의 대출 받아야 했다.
노예제도의 폐지
파라과이 전쟁은 1870년에 끝났고, 브라질의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비록 무역 수지는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이마저도 커피 (1870년도 수출에 56.5%)로 인해서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사실상 모든 상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커피 농장들의 노동력 기반은 아직도 노예였다. 그렇지만 브라질은 이미 국제적으로, 특히 영국으로부터 노예제도의 완전 폐지 압박을 시달리고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자 이제는 내부적인 여론도 형성이 된다.
당시 전쟁엔 총 20만 명의 군대가 참전을 했는데, 이들 중에는 백인 포르투갈계 브라질인들과 물라또 (브라질인과 원주민) 그리고 흑인들인 노예들도 함께 참전했다는 것이다. 백인들이 집에서 노예로 부리던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하였으니, 매우 아이러니 했을 법만 하다.
그렇게, 1871년 Lei do Ventre Livre로 노예의 자녀들은 해방이 되었고, 1880년에는 브라질내륙에서도 노예무역이 전면으로 금지된다. 그리고 1885년에 65세 이상의 노예들을 해방했으며, 1888년 그 유명한 Lei Aurea를 섭정자였던 Princesa Isabel가 서명함으로 노예제도는 브라질에서 전면적으로 폐지가 되어,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노예는 해방된다.
예견된 제국의 몰락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시점, 커피의 수출은 61.5%였고, 세계에서의 브라질 커피 점유율은 이미 절반을 넘길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그리고 세계는 현대화되어 입헌군주제는 형식상으로 유지가 된 채 많은 국가는 공화국으로 전환을 하고 있었다. 커피 남작들은 그토록 자신들이 반대했던 노예제도를 폐지한 제국에 불신을 공개적으로 표출해, 결국은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1889년 동 빼드로2세를 포함한 황족들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여, 공화국을 선포한다.
피를 흘리지 않은 채 공화국 선포를 했다는 것은 언뜻 평화적으로 보이나, 반대로는 브라질 제국의 힘이 얼마나 약했는지, 또 내부적으로 지지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 분명히 보이며, 겉으로는 강한 중앙권력체제를 유지해 보였던 브라질 제국은, 커피 남작들과 기득권으로부터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게 되었다.
19세기 말, 브라질은 약 천만 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 중 151만 명은 노예 출신, 39만 명은 이민자들로, 여전히 생산성이 매우 낮은 국가에다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도 없을 정도였고, 이제는 오갈 길이 없는 노예들이 많은 국가였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