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 나폴레옹의 등장은 유럽 모든 국가에 위협이었다. 1807년 나폴레옹은 프랑스 주변국을 포함해,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까지 점령을하였고, 영국과 매우 가까웠던 포르투갈 역시 그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강했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영국이라는 큰 산을 넘지 못했고, 여러 차례 교전 후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군사적인 방식은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방식의 압박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1806년 시행한 경제적인 압박인 대륙봉쇄령이다.
대륙봉쇄령으로 유럽의 국가들은 영국과 무역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받는 국가가 바로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과 영국과의 관계는 단순한 무역 관계가 아니었다. 19세기 초반 영국은 산업화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사실상 세계 금융시장을 리딩을 하는 역할을 갖고 있었으며, 많은 국가들에 주도적으로 대출을 해주곤 하였다. 결국, 포르투갈은 이러한 ‘관계’로 나폴레옹의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 선박들의 리스본 항구 출입을 허용을 하게 되며, 이에 반발한 프랑스군은 바로 포르투갈을 침공한다. 그렇게 당시 포르투갈의 섭정자인 조엉 6세와 여왕인 마리아 1세는 영국의 보호 아래 약 1만5천 명의 포르투갈의 상류층과 함께 브라질로 피난을 온다.
브라질로 도피를 온 포르투갈인들은, 단순한 귀족뿐만이 아니라, 왕족, 정부 고위관리층을 포함한 모든 기득권층의 이주였다. 그렇게, 브라질은 식민지가 아닌 포르투갈 왕권이 상주하는 국가 브라질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은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지배국가 왕정이 식민지로 이주를 한 것이다. 동 조엉 6세의 첫 경제적인 조치는 바로 브라질의 무역 개항이었다. 이제는 포르투갈과의 독점무역이 아닌, 다른 국가들과도 거래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식민 브라질에겐 큰 발전이었다. 물론, 영국에게 특혜는 계속되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수입되는 물품의 세금은 단지 15%밖에 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짧았던 발전 그리고 왕의 귀환과 함께 모든 금의 본국 송금
히우 데 자네이루는 포르투갈 왕국의 임시 수도로써 빠른 개발궤도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왕정은 도착하지 얼마 안 된 상황에 박물관, 극장, 도서관, 식물원, 상업 기구, 재무 자문기구 (재무부), 법원, 경찰, 언론, 대학교, 공장들을 설치하였고, 처음으로 브라질에서도 은행을 만들게 된다. 브라질의 첫 은행인 Banco do Brasil은 오늘날 중앙은행의 기본적인 역할인 화폐를 발행하게 되는데, 화폐는 걷어지는 세금과 금을 기반으로 발행되며, 은행은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모든 금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갖게 된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포르투갈 국민들은 국왕의 귀환을 요구하였고 또 왕권을 축소 시키는 개헌이 이루어진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불과 12년도 안 된 브라질의 발전은 동 조엉 6세의 귀환으로 멈춰지며, 그동안 브라질은행이 걷었던 모든 금들도 그의 귀환과 함께 모두 포르투갈로 송금이 되어, 달라질 것 같았던 식민지 브라질의 현실은 암울 그 자체였다.
비록 왕족들은 귀환했지만, 브라질의 경제 발전은 포르투갈보다 높았고, 일부 기득권층은 브라질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가길 원했다. 그리고 Bonifacio을 포함해 당시의 내각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822년 브라질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바로 브라질 역사의 첫 Jeitinho라고 불린다. 포르투갈인이었던 왕의 직계였던 아들을 브라질인으로 ‘귀화’를 시켜, 독립했기 때문이다. 비록 독립이라고 했지만,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경제에 절대적인 의존도가 있었고, 독립 전후의 정부 고위층은 그대로였으니, 과연 독립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언짢은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유일하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브라질-포르투갈 관계 외에도 브라질-영국이라는 관계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영국으로 받은 독립 자금과 첫 은행의 파산
더욱더 흥미로운 점은, 바로 외채에 대해서이다. 브라질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배상금을 내야 했었다. 그렇다, 아들이었던 동 빼드로 1세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아버지의 국가인 포르투갈에 배상금을 내야 했었다. 그래야만 독립이 인정되고, 브라질도 국가로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제국 브라질에 ‘손길을 내민 곳’이 바로 영국이다.
영국은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협상을 중재하였고, 약 30톤의 금을 브라질에 대출을 해주면서, 포르투갈에 배상금을 상납해 브라질 독립이 인정된다. 해당 금액은 약 2백만 파운드로, 브라질의 첫 외채가 된다. 그렇지만, 이미 무역수지 적자와 광산과 사탕수수 농장들의 몰락으로 낮은 경제 생산성을 갖고 있던 제국 브라질은, 영국에게 빌린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해, 매년 다시 부채를 협상했었다 (Funding Loan). 이러한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현실로, 브라질은 제국이었을 때나 공화정, 군사정권, 민주정권 때나 매년 외채를 협상한다.
1830년 아르헨티나와 벌인 우루과이 쟁탈전에서 패배한 브라질은 브라질 은행으로부터 자산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막대한 화폐 발행으로 은행이 신뢰성을 잃게 되자,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된다. 브라질에서의 인플레이션이 이때 처음 발생 했다고 봐도 무방하며, 브라질은 다시 오랫동안 은행과 같은 금융기구 없이 역사를 이어갔다.
결국 이 모든 복잡한 상황이 싫었는지, 제국 브라질의 초대 황제였던 동 빼드로 1세는 재임 9년 만에 5살밖에 되지 않은 그의 아들인 동 빼드로 2세에게 양위를 결정하게 되고, 제국 여러 섭정을 거쳐, 1841년 동 빼드로 2세가 15세가 되는 해에 왕위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커피와 노예무역
그래도 신은 브라질은 버리지 않았는지, 넓고 광활한 브라질 땅에 커피를 선물한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브라질에서는 1720년부터 커피 농장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의 커피 소비와 맞물려, 1840년도엔 이미 커피의 수출량이 금액으로 3배로 증가했다고 했다. 커피 농장은 새로운 비즈니스였고, 해당 업계에서는 농장 주들을 커피 남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들은 브라질의 신흥 비즈니스맨이자 경제의 주체가 된다.
그렇지만, 노예무역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영국의 태도 변화는 브라질 커피 비즈니스가 직면하게 되는 도전이었다. 사실상, 노예무역을 창설했던 영국은 19세기부터 노예무역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던 커피 농장주들과 노예무역 비즈니스맨들은 큰 타격을 맞게 된다.
(2부에서 계속 됩니다)
저자: 이재명 (Klavi 오픈뱅킹 핀테크 파트너, OKTA 상파울루 홍보 위원장)